정구·곽재우·이명호 등 3일간 여정
함안 도흥나루∼창녕·우포 뱃놀이
술판 벌이지 않고 경건한 친목활동
망우정·합강정·반구정 등 절경 여전

오늘은 조선 선비들의 낙동강 뱃놀이를 쫓아 가보겠습니다. 1600년대 초반에 작성된 <용화산하동범록>에 담긴 내용인데요. 함안 용화산 근처 낙동강에서 동범을 한 기록, 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용화산은 함안군 대산면 낙동강변에 있는 높이 193m 되는 산입니다. 지금도 용화산이라고 부릅니다. 이게 어디냐면 지금 남지 유채꽃밭 있지요? 남지철교 반대 방향으로 거의 끝까지 가서 거기서 강 건너로 보이는 곳입니다. 그러면 동범은 뭐냐. 같을 동(同), 뜰 범(泛)자입니다. 같이 뜬다, 즉 같이 배를 탄다는 뜻입니다. 보통 선비들의 뱃놀이는 배 선, 놀 유 자를 써서 선유(船遊)라고 합니다만, 이 동범이란 말은 낙동강 일대 선비들 사이에서만 쓰인 게 아닐까 싶어요.

▲ 남지철교에서 본 낙동강 변에 배들이 묶여 있다. /이서후 기자
▲ 남지철교에서 본 낙동강 변에 배들이 묶여 있다. /이서후 기자

◇대단한 선비들 함안을 찾다 = 동범록 내용을 좀 더 들여다보겠습니다. 때는 1607년 초봄. 딱 요맘때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란 분이 있습니다. 5살 때부터 신동 소리를 들었던 분이고 영남 유림의 지도자급이었지요. 이분이 관찰사도 하고, 대사헌도 지냈지만, 지방 고을 수령을 많이 했어요. 특히 1586년에서 1588년까지 함안군수를 지냈지요. 1607년 초봄에 함안군 대산면에서 남지로 건너가는 도흥나루에 도착합니다. 도흥나루는 지금 용화산 바로 앞에 있었습니다. 여헌 장현광(1554~1637)이란 분과 함께였습니다. 이분 역시 영남유학을 대표하는 학자입니다.

▲ 망우정. /경남도민일보 DB
▲ 망우정. /경남도민일보 DB

정구 선생이 함안군수를 지낼 때 비석으로 쓸 만한 돌을 구해서 강가에 두었는데, 그게 물에 빠졌던 모양이에요. 그걸 건지러 오셨어요. 도흥나루에 도착하기 전날에 정구 일행이 묵은 곳이 도흥나루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창녕 창암정이었습니다. 당시 망우당 곽재우(1552~1617)가 지내던 정자입니다. 지금은 망우정이란 이름으로 여전히 낙동강 변에 있습니다. 정구, 곽재우 두 분 다 남명 조식의 제자고, 임진왜란 때 각자 의병을 일으키기도 했죠. 이때는 임진왜란이 끝난 지 8년 정도 지난 시기입니다. 전임 함안군수, 영남 유림의 대표 학자, 그리고 임진왜란의 영웅이 한꺼번에 함안으로 오셨으니 함안 선비들로서는 대단한 기회였지요. 당시 함안군수를 하던 박충후(1552~1611)라는 분이 직접 마중을 나왔습니다. 이분도 임진왜란 의병장 출신이죠.

▲ 반구정. /경남도민일보 DB
▲ 반구정. /경남도민일보 DB

용화산 자락에 정자가 두 개 있는데 합강정, 반구정입니다. 합강정에는 입암 조식이라는 선비가, 반구정에는 두암 조방이라는 선비가 지내고 있었습니다. 두 분은 형제인데, 둘 다 임진왜란 때 곽재우 수하에 있던 의병장이었습니다. 대단한 분들이 온다는 소식에 조식, 조방 형제도 술과 음식을 마련해서 도흥나루로 갑니다. 이분들만 갔겠습니까? 함안은 물론이고, 창녕, 영산 지역에서 곽재우와 의병활동 했던 선비들이 다 모여듭니다. 이렇게 모인 이들이 배 두 척에 나눠 탔는데, 모두 35명이었다고 합니다. 사실 사람들이 더 왔는데 배에 자리가 좁아서 이 정도만 태웠다고 해요. 그리고 창녕 우포 방향으로 십리 길을 따라 뱃놀이를 즐겼다고 합니다.

▲ 망우정에서 바라본 낙동강. /경남도민일보 DB
▲ 망우정에서 바라본 낙동강. /경남도민일보 DB

◇엄숙하면서도 화기애애했던 뱃놀이 = 이 이후로 후대 선비들도 '야, 우리도 동범 한 번 해보자' 그러면서 낙동강에 동범 문화라는 게 생겼다고 합니다. 동범이라는 뱃놀이는 그저 '먹고 놀자' 하는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조선 선비 풍류 문화를 보면 오벽이라고 있어요. 다섯 가지 취미라고 할 수 있는데, 고서벽(古書癖), 탄금벽(彈琴癖), 화훼벽(花卉癖), 서화벽(書畵癖), 주유벽(舟遊癖)입니다. 책 수집, 악기 연주, 꽃 가꾸기, 글씨 그림 그리고 뱃놀이인데요, 이 중에 주유벽을 최고 경지로 봤다고 합니다. 조선 선비들의 생활은 생각보다 엄격했는데요, 특히 영남 유림은 자기 수양과 절제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앞에서 조식·조방 형제가 술과 안주를 준비했다고 했죠. 동범록에 보면 배 위에서 술잔이 돌았는데 '술판이 간결하고 경건했다, 시끄러운 웃음도 없고 장난스럽지도 않아 숙연하고 화목했다'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실제 동범이 어떻게 진행되었나 보면 먼저 한강 정구가 첫날 묵었던 창녕 망우정에서 시작합니다. 여기는 지금 가보셔도 풍경이 나쁘진 않습니다. 강 건너편으로 함안 쪽 강변에 오토캠핑장이 큰 게 있어서, 예스러운 분위기는 살짝 떨어지는 느낌이긴 합니다.

동범록에는 망우정에서 하룻밤 자고 다음날 아침에 내내에 올라 주위 산천의 경치와 암벽의 기이함을 살펴봤다고 돼 있습니다. 내내는 지금 남지철교 근처입니다. 내내라는 지명이 아직 남아있습니다. 지금 봐도 남지철교 주변으로는 강변 암벽들이 멋집니다.

기간으로 보면 총 3일이고, 본격적인 동범은 이틀 정도 진행한 것 같습니다. 당시 뱃놀이가 무르익었을 때 정구 선생이 오늘 이 뱃놀이를 기록해 두자고 제안해 함안 사람 이명호가 붓을 들고 먼저 정구, 곽재우, 박충후, 장현광 네 명의 이름과 자(字), 호(號), 생년, 거주지, 본관 등을 차례대로 적고는 다른 사람은 나이순대로 사는 지역과 이름을 적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용화산하동범록>입니다.

▲ 남지철교와 낙동강. /이서후 기자
▲ 남지철교와 낙동강. /이서후 기자

후대 선비들의 동범 기록으로는 모계 이명배라는 함안 선비의 글을 모은 <모계문집>에 '창암동범록'이란 글이 있습니다. 거의 100년 뒤인 1700년 3월 21일에 동범을 한 내용인데요. 여기 묘사된 풍경을 잠시만 살펴보죠.

"강가를 따라가니 언덕이 돌아 나오고 층층 벼랑 오래된 구멍들은 귀신이 깎고 파낸 듯하다. (중략) 한 굽이 또 도니 바로 창암(蒼巖)인데 옛적 망우당이 오두막을 지었던 자리다. 강물은 돈대를 패옥처럼 휘감고 배는 창암을 휘감으며 떠간다. 창암이 다하니 이윽고 멈추어 노를 내려 흐름 따라 내려간다. 비는 개고 흩뿌리기를 거듭하는데 김도 서리고 구름도 모였다 흩어지니 기이하다. 하얀 모래와 그 너머 드넓은 푸른 풀이 이곳 강호를 으뜸으로 멋지게 하였다."

실제 함안에서 창녕으로 이어지는 낙동강은 지금 뱃놀이를 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풍경입니다. 현재 용화산 합강정을 지나 반구정에 오르는 걷는 길이 잘 돼 있습니다. 코로나 사태가 지나면 한 번 걸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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