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붙이와 정담 나누는 외갓집 같은 공간
수없는 물음 깊이 고민하고 끝없이 변주
20년간 한글의 형태 아닌 의미·특성 집중
작년부터 모순적 감정 새기는 '치즈'작업

유난히 하늘이 파란 날이었다. 활짝 열린 대문 안쪽으로 펼쳐진 푸른 잔디가 인상적이다. 입구로 들어서니 차 두 대가 다정하게 주차해 있다. 오른쪽으로는 가지런한 텃밭이, 왼쪽으로는 세심한 손길이 느껴지는 정원이 있다. 구석구석 따뜻함이 묻어난다.

정원 곳곳에 자리한 돌이 예사롭지 않다. 독특한 모양새가 한눈에 봐도 한글조각가 이봉식(45) 작가 작품이다.

실내에 있던 이봉식 작가가 서둘러 나와 맞아준다. 인사를 나눈 그가 가장 먼저 자신의 형을 소개했다. 이 작가 형은 작업실 공간의 '실세' 이봉진 작가다. 이봉진 작가는 시인이자 서각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이봉식 작가는 밀양과 함양에 작업실을 두고 있는데, 밀양에서는 형님 공간에 더부살이를 하고 있다. 함양에서는 주로 돌 작업을 하고, 이곳에서는 나무 조각과 스케치, 아이디어 구상을 한다.

▲ 작품 뒤에서 웃고 있는 이봉식 작가 /김구연 기자 sajin@idomin.com
▲ 작품 뒤에서 웃고 있는 이봉식 작가 /김구연 기자 sajin@idomin.com

지난해부터 선보인 '치즈' 시리즈도 이 작업실에서 만들고 있다. 무거운 돌과 3m가 넘는 거목을 다루던 작가의 최신작이 '치즈'라니. 생뚱맞게 느껴지기도 한다.

조각 케이크, 정확히 말하자면 낮은 삼각기둥 형태의 나무 곳곳에 홈이 패어 있다. 파인 부분이 샛노랗게 칠해져 있는데, 이는 단순한 홈이 아닌 작가가 이전부터 다뤄왔던 말 줄임표, 느낌표, 물음표 등 문장부호들이다. 바닥에는 치즈가 흘러내린 것처럼 노란 칠이 돼 있고 '나는 치즈다. 치즈가 아니다'라고 적혀 있다.

지난해 미국 전시를 위해 작품 무게를 줄이면서 선보이게 된 작품이다. 가벼워진 만큼 작업 시간도 줄었다. 보통 돌 작업은 실제로 제작하는 데만 2~3주가량 걸리는데, 치즈 작품은 1주일 정도면 만들 수 있다.

제작 과정도 단순하다. 나무는 느티나무를 쓴다. 먼저 나무를 절단해 형태를 만들고 구멍을 판다. 아크릴판에 옮겨 구멍과 바닥에 아크릴 물감을 칠하고 말린 후 글을 적어넣으면 완성이다.

▲ 이봉식 작가의 작업실 풍경. /김구연 기자
▲ 이봉식 작가의 작업실 풍경. /김구연 기자

간단해 보이지만 색을 얹고 글을 쓰는 시간은 결코 가볍지 않다. 생각을 담아야 하기 때문이다. 치즈 작업은 이전 작품들과 동떨어져 보이지만 그 속에 담은 메시지는 일맥상통한다.

"치즈 작품 역시 한글, 텍스트가 가진 가장 큰 특징 '양가감정'을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치즈다. 나는 치즈가 아니다'라고 하는 것은 '네가 보는 게 전부가 아니다'라는 얘기거든요. 사람들이 작품을 치즈로 보지만, 실제로 노란색을 칠한 곳은 구멍이나 깨진 곳이지 치즈의 형태가 되는 곳은 철저한 나무 무늬잖아요."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이전 작업으로 이어졌다. 이봉식 작가는 '한글조각가'다. 주로 돌이나 나무에 한글을 새기는 작업을 했다. 그의 작품은 '한글'과 '문장부호', '공간'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봉식 작가 한글 작품이 특별한 건 한글 형태가 아닌 그 단어의 의미를 조각한다는 점이다. 작가는 계속해서 한글이 가진 양면성, 양가감정에 집중해왔다.

"가령 갓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 '사랑'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말일 겁니다. 하지만 사랑해서 결혼했으나 배우자가 다른 사랑을 만나 결혼생활을 끝내야 하는 사람에게 '사랑'은 지긋지긋한 단어일 뿐이죠."

▲ 삼각기둥으로 작품 '치즈' 작업을 하고 있는 모습. /김구연 기자
▲ 삼각기둥으로 작품 '치즈' 작업을 하고 있는 모습. /김구연 기자

그가 '음각'을 선호하는 이유도 공간을 이용해 양가감정을 표현하기 위함이다. '꽃을 위한 기념비'라는 작품이 있다. 통나무에 김춘수의 '꽃'을 새겼는데, 한 자를 파낼 때마다 나온 톱밥을 봉투에 담아 전시했다. 사람들은 통나무를 보고 시를 읽어내지만, 작가가 묻는다. 당신이 읽는 공간이 실체냐, 한 자 한 자 봉투에 담겨 있는 톱밥이 실체냐. 일반적인 조각 작품처럼 보이지만 개념 예술인 것이다.

2001년 한글 작업을 시작한 이후 문장부호, 쌀알, 치즈까지. 추상에서 구상을 향해 달려온 여정은 한글이 가진 특성과 의미를 단순화하는 작업이었다. 그 세월이 20년이다.

이봉식 작가가 한글 작업을 하게 된 이유는 뭘까. 그는 현재 김해 월산초등학교 선생님이기도 하다.

"어릴 적부터 창작 욕구는 있었지만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못했습니다. 대학 때 제가 친구들 미술 과제를 해줬는데 그걸 안 교수님이 저를 작업실로 불렀어요. 그분 밑에서 처음 미술을 배웠는데 교수님이 그러더라고요. 가장 한국적인 것을 해보라고. 그 말에 한글을 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이후 서예와 서각을 배웠다. 하지만 왠지 모를 갈증은 채워지지 않았다. 2010년 대학원에 진학했고, 일주일에 세 번, 하루 10시간을 길에서 보내며, 홍익대학교에서 석사와 박사과정을 마쳤다.

치열하게 고민하고, 그 수많은 물음을 끊임없이 변주하며 매번 새로운 작품을 선보이는 그. 이봉식 작가에게 작업실은 어떤 공간일까.

▲ 작업실 건너 들판을 풍경으로 서있는 이 작가와 김해수 기자.  /김구연 기자
▲ 작업실 건너 들판을 풍경으로 서있는 이 작가와 김해수 기자. /김구연 기자

"먼저 사람이 주는 힘이 크더라고요. 형의 공간이니 항상 긴장하게 되고, 형이 가볍게 던진 한 마디에 내가 놓친 부분을 볼 수 있습니다. 또 이곳에 있으면 비가 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작업을 안 하게.(웃음) 형님과 고기도 구워 먹고, 막걸리도 한 잔 하는데. 하지만 작업을 안 하는 게 작업을 안 하는 건 아니거든요. 내 생각을 녹이려면 시간이 필요한데, 이 작업실은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는 곳이죠."

작업이 돌고 돌아 예전 작품으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지금의 작업이 소중하다는 그. 외할머니 집처럼 푸근한 작업실에서 충분히 녹여낸 생각으로 어떤 작품이 탄생할지 기대가 된다.

▼작업실 주소 밀양시 부북면 무연리 46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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