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출신 박태성 문학박사 책 따라 발길…여산서당·영모재 등 인물·용도에 맞춘 모습 인상적

주택가를 걷다가 뜻밖에 마주치는 낡은 기와집이 있다. 시골 도로를 달리다 마을에서 좀 떨어진 곳에 지어진 아담한 기와집을 만나기도 한다. 보통 재실이라 불리는 전통 건축물이다. 재실에서는 조상을 모시거나 문중의 대소사를 논의하기도 하고, 학문을 가르치거나 함께 모여 시를 읊기도 했다. 운치 좋은 곳에 있는 누각이나 정자와는 또 다른 의미의 생활 여유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출판사 불휘미디어에서 나온 박태성 박사의 <창원의 누정>(2020년 1월)은 창원에 있는 누각, 정자, 재실, 전각 등에 대한 옛사람들의 글이 번역돼 담겨 있다. 205편의 글, 888쪽에 달하는 두꺼운 책이다. 무학산 입구 서원곡에 있는 관해정이나 창원향교처럼 익히 알려진 곳을 포함해 얼마나 다양한 전통 건축물이 생활 주변 곳곳에 자리 잡고 있는지 책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북면 영모재와 내서읍 여산서당 = <창원의 누정>, 사실 1962년 유당 김종하 선생이 발행한 <창원군지>의 하편 내용이다.

"상편은 지금까지의 읍지와 같이 연혁, 산천, 고적, 인물 등을 고루 실었고, 하편에는 창원에 있는 누, 정, 제, 각 등의 서문과 기문, 그리고 비문, 창원에 관여된 한시 등을 수록했다." (8쪽 '머리말' 중에서)

<창원군지>가 <창원시사>로 현대화하면서 한자로 된 하편 내용은 거의 반영되지 않았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박태성 박사가 오래 공을 들여 번역했다. 옛날 창원은 지금 마산회원구와 의창구 지역을 아울러 부르던 지명이다. 그러니 책에 나오는 건축물도 이 두 지역에 속한 것들이다. 마산회원구에서는 내서읍에 있는 여산서당을, 의창구에서는 북면에 있는 영모재를 찾아가 봤다.

여산서당은 내서에서 함안으로 넘어가는 큰길에서 아주 가까이 있다. 중리마을회관 근처다. 이곳은 임진왜란 당시 최초 의병을 일으킨 것으로 알려진 무숙공 박진영 장군을 위한 재실이다. 책에 실린 '여산서당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 창원시 의창구 소답동 창원향교. /이서후 기자
▲ 창원시 의창구 소답동 창원향교. /이서후 기자

"옛날 선조 인조 임금 연간에 무숙공 광서 선생 박진영은 국가를 중흥시키는 공적을 세우고도 포상과 봉작을 받는데 뜻을 두지 않고 향리로 돌아와 광려산 아래에 재실을 짓고 십여 년간 강학을 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의병을 일으켜 정벌에 나섰다가 중간에 화의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고 돌아서 다시 광려산으로 들어가 죽을 때까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745∼746쪽)

박진영 장군이 실제로 살던 곳이 빈터로 남아 있자, 후손들이 다시 재실을 세운 게 지금까지 남아있다. 대문 이름이 '역락'이다. 본당에는 '여산서당'이란 편액이 걸려 있다. 책을 보면 본당은 '불온', 방은 '극기'라고 이름 붙였다고 돼 있다. 모두 논어에서 나오는 말로 군자의 참 모습을 뜻한다.

북면 영모재는 창원성심노인전문요양원 근처 도태마을에 있다. 가구 수는 얼마 안 되는 것 같은데, 느낌이 편안한 동네다. 이 동네 제일 높은 곳에 영모재가 있다.

"회산 고을 북쪽 2리 정도에 산수의 정기가 모여서 한 골짜기를 이루니 내곡이다. 마을 경계에 우뚝한 하나의 전각이 솟았고 국사봉이 둘러쳤고 도사 고개가 양쪽을 끼었다. 그 편액은 영모라고 하였는데, 이는 조선의 기둥이던 신하 회산 구공의 묘를 지키는 재실이다." (648쪽 '영모재기' 중에서)

실제 바로 위편에 조선 전기 병마절도사를 지냈고, 창원 구씨 중시조인 구복한의 묘소가 있다. 가까운 곳에 창원시가 창원을 상징하는 인물로 내세우는 최윤덕 장군의 생가지가 있는데, 둘은 친구로 같은 시대에 나란히 벼슬길에 올랐다고 한다.

▲ 창원시 의창구 북면 영모재. /이서후 기자
▲ 창원시 의창구 북면 영모재. /이서후 기자

현재 영모재는 수리를 제법 해서 낡은 기와집은 아니다. 영모재 대문인 시심문 앞에 서면 동네 앞 들판이 훤하다.

사실 영모재(永慕齋)란 이름이 붙은 재실이 꽤 많다. 한자 그대로 영원히 사모하겠다는 뜻이니 조상을 기리자고 만든 재실에 딱 어울린다.

◇주택가에 남은 고려시대 성 = 책에 나오는 누각이나 정자도 꽤 많은데, 무학산 서원곡 입구의 유명한 관해정에 대한 것도 여러 편이다. 누각이나 재실 말고도 덩치가 큰 건축물에 대한 기록도 있다. 합포성지나 창원향교 같은 곳이다.

마산회원구 합성동에 있는 합포성지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자료 제153호로 지정된 고려시대 성터다.

솔직히 이번에 처음 가봤다. 표지판에는 1378년 왜구 침략을 막으려 이곳에 부임한 배극렴(1325∼1392)이 병사와 주민을 동원해 쌓았다고 돼 있는데, 책에 고려 말 조선 초기 문신 이첨(1345∼1405)이 쓴 '병영구성기'에 보다 자세한 내용이 나온다고 적혀 있다.

"일찍이 병영이 전화로 소실되어 군사들이 야외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문하평리 조공이 땅을 고르고 길일을 잡으니 정사년(1377년) 봄이었다. 지문하사 우공이 그 땅에 병영을 짓다가 얼마 되지 않아 나라의 부름을 받고 서울로 돌아갔다. 병산의 배공이 부원수로서 대신 맡아 그 무리들을 진수하여 군영을 수선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20쪽)

▲ 창원시 마산회원구 내서읍 여산서당. /이서후 기자
▲ 창원시 마산회원구 내서읍 여산서당. /이서후 기자

배극렴은 병영 완성 후 아예 성을 한번 쌓아보자며 사람들을 부추긴다. 성이 없으니 침략을 받아도 안심하고 기댈 데가 없다는 이유였다. 흙, 벽돌, 그냥 돌 세 재료 중에 고민하다 결국 그냥 돌로 쌓기로 한다. 튼튼하면서도 공사 기간을 줄일 수 있다는 이유였다.

"멀리서 바라보면 기이하고 가까이서 보면 우뚝하고 깎은 듯이 서서 감히 범접하지 못하게 하였다. 또 둘레에 환호를 파서 물을 채우고 한 곳을 막고 터서 들고 내릴 수 있는 사닥다리 교량을 만들었다. 산천을 둘러 감싸니 그 규모는 광대하고 멀다." (21∼22쪽.)

지금은 그 성벽 일부가 주택가 한가운데 남아 있는데, 오랜 세월을 견디고 남은 것들이 으레 그렇듯 뭔가 단단하면서 쓸쓸한 느낌이다.

반면에 의창구 소답동에 있는 창원향교는 지금 봐도 반듯하고 깔끔하게 유지되고 있다. 책에는 창원향교와 그 내부 건물에 대한 글도 꽤 많이 실려 있다.

▲ <창원의 누정> 박태성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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