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 음악가·백인 운전사 함께 차별 겪으며 친구 돼
외국인에게 마스크 안 준 코로나 관련 기사 떠올라

코로나19 사태 장기화로 모두가 불안하고 날카로운 시기다. 이럴 때일수록 더 소외된 이들을 배려하는 마음이 필요하겠다. 외출이 조심스러운 요즘 집에서 '함께' 가치를 생각하며 볼 수 있는 영화를 골라봤다.

1960년대 미국 남부 시골길을 달리던 에메랄드빛 차량이 갑자기 멈춰 선다. 백인 운전사가 내려 차량에 문제가 있는지 확인한다. 뒤따라 그를 고용한 흑인이 문을 열고 내린다.

바로 옆에서 밭을 갈던 흑인 일꾼들이 하나둘 몰려든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봤다는 듯이. 고급 정장을 빼입은 흑인과 무리가 마주 본다. 그들은 한동안 서로 응시하는데 양쪽 모두 표정이 복잡하다.

영화 <그린 북>(감독 피터 패럴리)은 주인공 '토니 발레롱가(비고 모텐슨)'가 일자리를 구하면서 시작된다. 토니는 흑인 수리기사가 입을 댄 컵을 쓰레기통에 버릴 정도로 편견이 심한 사람이다. 하지만 일자리가 절실했던 탓에 천재 피아니스트 '돈 셜리(마허샬라 알리)' 운전사가 된다.

영화는 허풍과 주먹이 주특기인 토니, 교양과 우아함의 결정체 셜리 박사가 8주 동안 콘서트 투어를 하면서 서로 알아가는 과정을 담았다.

투어를 출발하는 날 영화 제목이기도 한 '그린 북' 정체가 밝혀진다. 그린 북은 1936년부터 1966년까지 미국에서 출간된 흑인 전용 여행 안내책자다. 당시 흑인은 아무 곳에서나 숙박, 식사를 할 수 없었다. 그래서 흑인 여행자들이 이용할 수 있는 숙박 시설, 식당, 주유소 등 정보가 들어 있는 정보지를 팔았다. 여행을 하는 흑인에게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다.

<그린 북>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인데, 몇몇 장면에서는 '에이, 설마'라는 마음이 생긴다.

가령 셜리 박사가 연주 초청을 받아 대저택을 방문한다. 그를 환영하며 친절히 대하던 주인이 저녁 식사자리에서 메뉴를 소개한다. 주인은 가정부에게 물어 셜리 박사가 좋아할 만한 음식을 '특별히' 마련했다고 한다. 바로 '가정식 프라이드 치킨'이다. 무식한 건지, 무심한 건지, 무례한 건지. 그 자리에 있던 신사 숙녀는 기뻐하며 손뼉을 친다.

▲ 실존 인물이기도 한 흑인 천재 피아니스트 '돈 셜리'와 백인 운전사 '토니 발레롱가'의 동행을 그린 영화 <그린 북>의 한 장면.  /스틸컷
▲ 실존 인물이기도 한 흑인 천재 피아니스트 '돈 셜리'와 백인 운전사 '토니 발레롱가'의 동행을 그린 영화 <그린 북>의 한 장면. /스틸컷

셜리 박사는 당황했지만 웃어넘기고 연주를 시작했다. 1부가 끝나고 인터미션 시간. 화장실 앞에 서 있는 셜리 박사에게 주인이 다가간다. 화장실을 찾는다면 저곳으로 가보라며 전나무 앞에 있는 허름한 화장실을 권했다. 흑인 전용 화장실이다.

놀랄 만한 장면은 곳곳에 있다. 셜리 박사가 흑인이라는 이유로 옷 가게에서 옷을 입어보지 못하고, 늦은 시간 돌아다닌다고 경찰에게 붙잡힌다. 술집에서 술을 마신다는 이유로 폭행을 당하기도 한다.

셜리 박사는 "무대를 내려오는 순간 그 사람들한텐 나도 그냥 깜둥이일 뿐이야. 그게 그들의 진짜 문화니까!"라는 한 서린 대사를 쏟아내기도 하지만, 온갖 수모를 버티며 마지막 공연 장소에 도착한다. 그런데 공연 장소인 식당 종업원이 운전사인 토니는 식사할 수 있지만, 셜리 박사는 안 된다고 막았다. 전통이라고 했다. 셜리 박사는 이번에도 잘 참고 투어를 무사히 마칠 수 있을까.

마지막 공연 장소에 이르기까지 토니는 백인인 자신이 경험한 적 없는, 흑인을 향한 무자비한 차별을 목격한다. 토니는 조금씩 셜리 박사의 슬픔에 공감하며 둘은 진정한 친구가 된다.

인종 차별을 그린 <그린 북>은 <기생충>의 미국 아카데미 작품상 한 해 선배다. <기생충>과 마찬가지로 무거운 주제를 다뤘지만 어렵지 않게, 어둡지 않게 그려냈다.

영화에 활력이 된 건 '토니 발레롱가'. 생각이 단순하고 말보다 주먹이 앞서 종종 사고를 치지만, 가족을 끔찍이 사랑하고 다른 사람의 아픔을 느낄 줄 아는 캐릭터다.

물론 토니 역할을 맡은 비고 모텐슨의 능청스러운 연기가 캐릭터와 혼연일체를 이뤄 토니를 더욱 실감 나게 표현했다. 참고로 비고 모텐슨은 한국에서도 흥행한 영화 <반지의 제왕> '아라곤' 역을 맡기도 했다.

<그린 북>의 힘은 '공감'에 있지 싶다. 차별받는 이들이 겪는 공포, 고통에 공감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아름다운 일인지를 보여준다.

공교롭게도 이 영화를 본 날 기사를 하나 읽었다. 대구 남구청에서 주민들에게 마스크를 지급했나 보다. 그런데 외국인은 제외란다. 한국에서 태어나 49년을 살았고, 한국인과 결혼한 영주권자이며, 아이를 둘 낳고, 주민세를 내고 있더라도 국적이 다르면 마스크를 안 준단다.

국적이 다르다고 이 상황이 무섭지 않을까? 공감에 대해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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