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습무 집안서 11대째 굿판 이어…초대 보유자 정모연 선생이 고모
미신 편견 서러워 타 직업 전전도 "전통 굿 위상 재정립, 평생의 업"

정영만(64) 선생은 11대째 집안 대대로 굿판을 이어왔다. 어릴 때부터 신청(神廳·현재 전통예술학교와 같은 기관)에서 자연스레 춤을 추고 소리를 했다. 그에게는 예인(藝人)의 피가 흘렀지만 세습무(世襲巫)로 살아가기엔 현실이 녹록지 않았다. 굿, 무당에 대한 사회적 편견은 뿌리가 깊었다. 열 살도 채 되지 않은 나이에 친구들에게 들은 모진 말은 마음의 멍이 돼 성인이 돼서도 이 길을 벗어나고자 발버둥쳤다.

"새마을운동 때 정부가 굿을 미신으로 치부했고 기독교인까지 가세하면서 미개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지금이야 이렇게 말하지만 과거엔 이 말조차도 할 수 없었죠." 정 선생은 그냥 담담하게 말했다. 근데 그 담담한 말투가 더 가슴 아프게 들렸다.

-굿을 업으로 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요?

"제가 왼쪽 귀가 안 들려요.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때 기독교인들에게 미신 믿는 무당집 아들이라고 맞았거든요. 그때 이건 안 해야겠구나, 내가 큰 죄인이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뭐 이루 말할 수 없죠. 무당집 아들보다는 기술자가 낫겠다 싶어 배도 타고 택시기사도 하고 안 해 본 게 없어요. 그런데 1987년 한 날 왕고모님(정모연)이 우리 집에 와서는 '문화재 지정이 되면 정부에서 돈이 나온다'며 명맥을 함께 이어보자고 하는 겁니다. 내 선생님이고 왕고모님이 도와달라고 하는데 어떻게 저버릴 수 있습니까. 그날 저녁에 기분 좋게 같이 밥을 먹고 있는데 박복률 선생님이 돌아가셨다고 우리 동생한테 전화가 왔습니다. 그래서 할머니하고 둘이서 하게 된 거지. 그날이 남해안별신굿 지정 날짜(1987년 7월 1일)예요."

그는 어릴 때 왕고모 정모연(남해안별신굿 초대 보유자)에게 무무와 무가를, 정봉호(정영만의 할아버지, 대사산이)에게 피리와 징, 장구를 사사했다. 그는 "세습무를 정말 안 하려고 했다"고 말했지만 음악이 좋고 소리가 좋아 개인택시를 하면서도 피리는 손에서 놓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하기엔 사회가 무서웠지만 그는 1대 보유자 정모연과 2대 보유자 고주옥이 세상을 떠나면서 자연스레 큰무당 격인 남해안별신굿의 '대사산이'가 됐다. 정 선생은 굿을 통해 사람들이 안위를 찾을 때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 정영만 남해안별신굿 예능보유자 겸 남해안별신굿보존회장이 경남도민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구연 기자 sajin@idomin.com
▲ 정영만 남해안별신굿 예능보유자 겸 남해안별신굿보존회장이 경남도민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구연 기자 sajin@idomin.com

-선생님께서 생각하는 굿이란 무엇입니까.

"살아있는 사람들을 북돋아주고 더 용기 나게 해주는 게 굿의 역할이죠. 제가 어릴 때만 해도 굿하는 게 생활화됐어요. 쉽게 말하자면 아기를 낳거나 초상 치르거나 집안의 대소사는 무당이 처리를 했습니다. 만물박사처럼요. 남해안별신굿에는 마을을 처음 세운 조상에게 감사하고 평안을 비는 별신굿, 죽은 사람을 좋은 곳으로 보내며 산 사람의 마음을 풀어주는 오구새남굿, 각 가정에 복을 빌어주는 도신굿이 있습니다. 굿은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한 거예요. 세월호 참사 같은 경우도 부모의 입장에선 세끼 밥먹는 것도 눈물이 나서 못 먹는데 어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과의 인연이 여기까지라고 살아있는 사람의 마음을 정화해줘야죠. 굿은 국악의 모태이자 예술의 근본입니다. 그런데 굿은 그간 비과학적이고 비논리적이라며 미신집단으로 보고 천대와 멸시를 받았죠. 그나마 무형문화재로 지정돼 이렇게 유지하고 근근이 숨을 쉬는 겁니다. 이제 굿의 역할이 무엇인지 되새기고 어떻게 발전시켜나가야 할지 생각해야 합니다."

-남해안별신굿과 동해안별신굿의 차이는 무엇인지 궁금한데요.

"동해안은 악기편성이 타악 위주지만 남해안별신굿은 타악, 관악, 현악 등 삼현육각이 같이 연주됩니다. (그는 자신의 핸드폰에 저장된 시나위를 들려주면서) 악사들이 악보 없이 마음과 마음만으로 서로 즉흥성 있게, 불협화음인 듯 화음을 이루는 게 특징입니다."

-자녀들(은주·석진·승훈)도 남해안별신굿 이수자로 12대째 대물림을 한다고 들었습니다.

"대를 이어야 한다는 일념에 제가 시켰어요. 한편으로는 미안하기도 합니다. 우리 딸, 아들 생계가 안 되니까. 아이들이 어릴 때 짜장면 사주고 비디오도 굿하는 비디오 보여주면서 세뇌를 시켰죠. 남해안별신굿보존회 제자들도 사명감으로 하고 있습니다. 대견하고 미안하고 만감이 교차하네요."

정 선생에게는 꿈이 있다. 남해안별신굿이 활성화되는 것보다는 사람들이 그 가치를 알아줬으면 하는 꿈 말이다. 그간 정부와 언론은 굿을 미신이라고 터부시하는 편견을 심었다. 우리 전통문화인 굿이 멸시받았고 대를 이어 굿을 지켜온 사람들을 홀대했다. "농담이 아닙니다. 정부에서 이렇게 묵사발을 해놓았으니 다시 잘할 수 있게 해줘야 합니다. 저 혼자서는 힘듭니다. 우리의 전통문화 제대로 알아줬으면 합니다."

▲ 징을 치며 구음하는 정영만 보유자. /남해안별신굿보존회
▲ 징을 치며 구음하는 정영만 보유자. /남해안별신굿보존회

 

남해안별신굿은?

어민들 풍어 기원하는 통영·거제지역 마을굿

남해안별신굿(국가무형문화재 제82-4호)은 예로부터 남해안의 통영과 거제를 중심으로 행하여 오는 마을굿의 하나다. 집안 대대로 무업을 하는 세습무들에 의해 전승됐다. 마을의 평안과 장수를 기원하며 어민들이 고기를 많이 잡을 수 있도록 풍어를 기원하는 굿이다. 주로 음력 정월 초에 열린다. 과거에는 마을마다 별신굿이 행해졌으나 군사정권 시절 미신타파와 산업화, 도시화로 많이 사라졌다. 현재는 거제 죽림마을과 통영 죽도마을에서 2년에 한 번씩, 통영 사량도 양지리 능양마을에서 10년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열린다. 4박 5일씩 하던 굿도 오늘날 1박 2일, 2박 3일로 짧아졌다. 굿판을 주도하는 이들은 지모(무녀)와 산이(악사)들이다. 대사산이(큰 악사)는 지모와 산이를 길러내는 스승이다. 사람들은 별신굿이 열릴 때면 마을의 역사와 같은 지동궤를 제청에 모셔두고 지동굿을 지냈다. 지동궤는 마을이 처음 형성됐을 때부터 마을의 대소사를 기록한 문서 등이 담긴 궤짝이다. 제청에는 마을 주민들이 정성껏 차린 밥상들이 줄지어 놓인다. 남해안별신굿 악기 편성은 삼현육각이며 즉흥적으로 자유롭게 연주하는 시나위가 특징이다. 1987년 7월 1일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됐고 현재 보유자 1명(정영만), 이수자 17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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