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직전에도 독서에 빠진 슈베르트
지금 필요한 '비관 빼고 희망 더하기'

1828년 11월 12일, 슈베르트는 친구 프란츠 쇼버에게 편지를 썼다.

"몸이 안 좋네. 11일 동안 아무것도 못 먹었고 마시지도 못했네. 비틀거리며 의자와 침대를 오가는 신세야…. 절망적인 이 상황에서 문학으로 나를 도와주지 않겠나? 쿠퍼의 소설 중에서 <모히칸족의 최후>, <스파이>, <키잡이>, <개척자들>을 읽었는데, 혹시 이것 말고 다른 그의 소설이 있으면 커피하우스의 폰 보그너 부인한테 맡겨놓지 않겠나. 양심적인 내 형이 틀림없이 나에게 전달해줄 것이네. 어떤 책이든 괜찮네."

이 편지를 쓴 일주일 후인 11월 19일에 슈베르트는 서른둘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침조차 삼키기 힘든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책 한 권을 더 보고 싶어 했다. 나는 이 마음을 '예술의 심장'이라고 말하고 싶다. 애틋함을 넘어 경외의 마음이 든다.

갑자기 세상사가 사칙연산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더하고 곱하고 나누고 빼는 이치 말이다.

아주 개인적인 느낌으로 비유해보자면, '더하기'는 욕망이라고 생각한다. 욕망은 쉬지 않고 휘둘러야 하는 양날의 칼 같다. 잘못하면 자기 손을 베인다.

'곱하기'는 개인으로든 사회적으로든, '혁명'에 해당하는 것 아닐까?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지만 어쨌든 많은 것을 바꿔낸다.

이에 비해 '나누기'는 종교, 또는 종교적 이상이라고 본다. 영원한 이상향이다.

그렇다면 '빼기'는? 나는 여기에 예술이 숨 쉬고 있다고 생각한다.

끊임없이 더하라고 부추기며 소란을 떠는 세상에 거리를 두는 것, 일정 부분을 포기하는 것, 물리치고 덜어내고 시선을 돌려서 아름다움에 오롯이 집중하는 것, 그것이 예술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슈베르트의 마지막 편지는 그 힘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코로나19 때문에 모든 분야가 위축되었다. 마치 모든 것이 일시 정지된 듯하다. 시간이 빈다고 여행을 하거나 돌아다니기도 어렵게 되었다. 삼삼오오 모여서 밥을 같이 먹으며 수다를 떨기도 신경 쓰인다. 그렇다고 해서 온종일 텔레비전 뉴스만 보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자, 이 비어버린 시간을 어떻게 한다?

개인위생에 주의하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지나친 비관론에 빠지는 것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래서 휴대전화만 쥐고 사는 친구들과 책과 음악에 관해 얘기 나누기로 했다.

그동안 바빠서 못 읽은 책, 들어봐야지 생각했지만 못 듣던 음반에 대해 서로 권하고 짧은 감상을 보탠다. 마치 오래 잊고 있던 옛사랑의 기억을 떠올린 듯, 온라인상의 대화가 갑자기 풍성해졌다.

베토벤의 전기를 읽고 슈베르트의 마지막 피아노오중주를 들은 후 친구는 이렇게 썼다.

"그렇구나, 책과 음악이 있었구나!"

그는 판도라의 상자 맨 밑바닥에 '희망'이 남아 있는 이유를 상기하게 되었다고 했다.

나는 나대로 영화 <쇼생크 탈출>(1995년 개봉작)의 한 장면이 생각났다. 기나긴 복역 끝에 출소한 늙은 레드는 앤디가 남겨놓은 편지를 발견한다. 그 편지의 뒷부분에는 이렇게 써놓았다.

"거봐요 레드, 희망은 좋은 거예요. 아마 가장 좋은 걸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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