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 못 하게 된 국회의원 역할
정치·사회·가부장적 가정 총망라
현실 변주하는 사이다 같은 대사
그 아니면 쉽지 않을 연기 인상적

개봉 소식에 관심을 둔 영화는 따로 있었다. 그 영화를 예매하려다 같은 시간 상영하는 코미디 영화 <정직한 후보>(감독 장유정)를 선택했다. 좀처럼 웃을 일이 없는 요즘, 기분전환이라도 할 수 있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설정은 꽤 흥미롭다. 거짓말을 못하는 정치인이라니. 설정만으로 정치인들이 의문의 1패를 당한 듯하다. 아무래도 정치인과 정직은 거리가 있지 않나.

줄거리는 단순하다. 거짓말이 제일 쉬운 3선 국회의원 주상숙(라미란 분)이 주인공이다. 4선에 도전하고자 동분서주하던 주상숙은 선거를 며칠 앞둔 어느 날 할머니 기도(라 쓰고 저주라 읽는다)로 거짓말을 못하게 된다.

생방송 라디오에 출연해 마음속에 고이 숨겨뒀던 천기누설 '대선 출마'의 꿈을 발설하고 만다. 자서전 출판 기자회견에서는 대필했음을 시원하게 고백한다. 자신의 머리카락이 가발이었다는 사실과 함께.

황당하기 짝이 없는 상황을 수습하던 주상숙은 그 과정에서 자신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게 되고, 개과천선한다는 이야기다. 설정은 참신하지만 결과는 뻔한 내용이다.

하지만 역시 영화를 살린 건 '라미란'이다. <정직한 후보>는 브라질에서 흥행에 성공한 영화 (2014)를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원작(표절 시비가 있기는 하지만) 주인공은 남성이다.

감독이 한 매체와 인터뷰한 내용을 보면 '거짓말을 일삼는 주인공이지만 너무 밉지는 않은' 어려운 콘셉트를 소화할 수 있는 유일한 배우로 '라미란'을 찍었다고 한다. 라미란을 캐스팅하면서 주인공 성별이 바뀐 것이다. 대단한 신뢰고, 정확한 판단이었다.

▲ 영화 <정직한 후보>에서 거짓말을 못하는 저주(?)에 걸린 4선 도전 국회의원 주상숙 역할을 맡은 라미란. 틀어막은 입에서 새어나오는 사이다 대사들이 라미란이라 더 청량하게 다가온다. /NEW
▲ 영화 <정직한 후보>에서 거짓말을 못하는 저주(?)에 걸린 4선 도전 국회의원 주상숙 역할을 맡은 라미란. 틀어막은 입에서 새어나오는 사이다 대사들이 라미란이라 더 청량하게 다가온다. /NEW

라미란은 중반 이후 긴장감이 급격히 떨어지는 영화를 홀로 지탱해낸다. 능구렁이 같은 후보자, 철부지 손녀딸, 구박받는 며느리, 과거를 돌아보고 반성하는 한 인간을 자유자재로 그려냈다. 틀어막은 입에서 새어나온 사이다 대사들도 라미란이라 더 청량하게 다가온다. 캐스팅의 중요성, 배우의 힘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느낀다.

연기와 춤, 노래까지 자신이 얼마나 스펙트럼이 넓은 엔터테이너인지를 마음껏 뽐내며 라미란은 대체 불가능한 '주상숙'을 연기한다. 한 인터뷰에서 라미란은 '롤모델로 삼은 정치인이 있느냐'는 질문에 '캐릭터에만 집중했다'고 답했으나 총선을 앞둔 시기라 기존 정치인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감독은 지난해 4·3 보궐선거, 특히 창원 성산구 선거 현장에서 많은 걸 배웠다고 밝힌 바 있다. 창원 중심지 풍경을 묘사한 부분이 인상적이다. 한쪽에서는 절을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마이크 잡고 유세하고 있고 또 다른 정당이 몰려다니고 있었다고.

눈길은 4·15 총선을 앞두고 시민들에게 고개 숙이며 인사하는 정치인들에게 쏠린다. 저들이 주인공 주상숙처럼 '진실의 주둥아리'를 얻게 된다면 어떤 말들을 내뱉을지 궁금하다.

영화 중반 주상숙 캠프에서 캐치프레이즈를 '약속을 지키는 서민의 일꾼'에서 '정직한 후보'로 바꾼 뒤 지지율이 상승한다. 아무래도 '약속을 지키는 서민의 일꾼'보다 '정직한 후보'에 더 끌리는 건 너무 많이 당한 탓일까.

그동안 정치를 다룬 한국 영화는 많았으나 정치인 역할은 남성 배우만의 전유물이었다. '여성 정치인'을 전면에, 그것도 원톱으로 세웠다는 점도 이색적이다. 이 역시 라미란이었기에 가능했으리라.

총선에 출마하는 모든 정치인이 정직한 후보가 되는 상상을 해본다. 당사자들은 오싹하겠으나 상상만으로도 웃음이 나온다. 공약만 봐서는 도통 누구에게 표를 줘야 할지 헷갈리는데, 모두가 진실만을 말한다면 누구를 뽑을지 결정하기가 한결 쉬워질 것 같다.

신나게 웃고 영화관을 나왔는데, 뒷맛이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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