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치수 한국전쟁전후민간인희생자 경남유족회장 인터뷰

'국가를 믿은 국민을 배신한 잔혹한 국가'.

국민보도연맹 사건을 접하면 떠오르는 생각입니다. '보도연맹' 하면 '민간인 학살'을 떠올리는 분은 꽤 있습니다. 그런데 간혹 '보도연맹'을 반국가 조직 정도로 생각하는 분을 접합니다. 이렇게 시작한 해석은 반국가 조직을 정부가 진압하는 과정이 조금 거칠었다는 쪽으로 흐릅니다. 그렇게 접근하면 이 사건에 담긴 잔혹함을 절반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보도연맹은 국가가 주도한 관변단체입니다. 반공 아니면 불손한 것으로 규정하는 정부는 사상적 결백을 증명하는 방법으로 보도연맹 가입을 권합니다. 그렇게 가입한 사람들을 정리한 명단이 한국전쟁 이후 그대로 '살생부'가 됩니다.

"빨갱이가 아닌 것을 증명하려면 가입하라고 했는데 가입한 것을 보니 빨갱이가 맞네."

이 황당한 논리로 그 많은 사람에게 죄를 씌워 죽입니다. 그렇게 죽은 사람이 수만 명에서 수십만 명이라고 합니다. 정확히 몇 명인지 모른다는 말입니다. 노상도 씨는 1950년 억울하게 사형을 받은 그 많은 피해자 가운데 한 명입니다. 2020년 2월 14일 아버지 존재조차 모르고 자랐던 아들 노치수 씨는 70년 만에 아버지는 '무죄'라는 판결을 받습니다. 노치수 한국전쟁전후민간인희생자 경남유족회장을 17일 경남도민일보에서 만났습니다. 

오디오 맥도날드 1회 - 70년 만에 '무죄' 듣기

▲ 17일 경남도민일보를 찾은 노치수(가운데) 한국전쟁전후민간인희생자 경남유족회장. /손유진 기자
▲ 17일 경남도민일보를 찾은 노치수(가운데) 한국전쟁전후민간인희생자 경남유족회장. /손유진 기자

- 유족을 대표해 많이 애쓰셨습니다. 소회가 궁금합니다.

"70년 만에 무죄 선고였고, 소송을 한 지 7년 만에 무죄 선고를 받았습니다. 저희는 당연하다 생각하고, 판단합니다. 물론 역사적인 의미가 크겠죠. 우리가 소송을 시작할 때는 막연하게 했지만,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고 하긴 했지만, 이렇게 무죄가 나오니까 저희 유족은 참 무덤덤하달까. 한편으로는 반갑고, 어떤 면에서는. 지금에 와서는 우리가 어떻게 처신을 해야 좋을지 그런 생각도 들고 여러분의 응원에 무죄가 나오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 일단 보도연맹이 국가 주도 관변단체라는 점을 짚어야겠습니다. 학살 대상이 반정부 조직 아니었나 오해할 수도 있으니 추가 설명 부탁합니다.

"제가 아는 상식으로는 보도연맹 만든 계기가 일제시대, 우리나라가 을사늑약에 따라 한일병합이 됐습니다. 많은 애국지사, 독립운동가, 국민이 반발을 했습니다. 일본 정부가 반대 세력을 계도시킨다는 의도로 '대화숙'을 조직했습니다. 이걸 본따서 아마 당시 1949년 오제도 검사가 보도연맹을 만든 것이다, 이렇게 전해지고 저도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 무죄 선고를 받은 희생자 6명 가운데 아버지 노상도 씨가 있습니다. 희생 시기를 보면 기억이 거의 없을 듯합니다.

"저는 아버지 기억이 전혀 없습니다. 세 살 때 아버지가 그렇게 되셨고. 저는 고향이 구산면 수정리 안녕마을인데, 아버지는 마산에 주로 계셨습니다. 아버지는 또 일본 와세다대를 졸업하기 전까지는, 이야기 듣기로는 성호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동래중학교, 일제 강점기에는 중학교가 5년제였는데, 여기 다닐 때 학생 독립운동에 참여했고 일본 교사들이 '저 학생은 그대로 두면 안 된다'고 해서 일본으로 강제 전학을 시킨 것으로 압니다. 물론 할아버지 등 가족 승인이 나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동래중학교 다니다가 일본으로 보낸 것으로. 그래서 일본 와세다대를 졸업한 것으로 압니다."

- 누군가를 통해서 들은 것이지 기억은 전혀 없으시지 않으십니까?

"전혀 없죠. 클 때 아버지가 아예 없다고만 생각했습니다. 예사로 흘러갔죠. 어리니까."

▲ 노치수 한국전쟁전후민간인희생자 경남유족회장. /손유진 기자
▲ 노치수 한국전쟁전후민간인희생자 경남유족회장. /손유진 기자

- 사망 과정, 뭔가 석연찮다고 느낀 시기는 언제입니까?

"고등학교 다닐 무렵 문득 생각 나는 것이, 나는 왜 아버지가 안 계실까. 어머니에게, 봄으로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데, 조그마한 동네인데, 앞산이 있고 진달래가 폈고, 형수님들과 연세 많은 분들 이야기 하는데, 문득 아버지는 어디 가셨느냐 물으니까 대답을 안 하시고 눈물을 글썽이셨습니다. 너희 아버지 돈 벌러 갔다고만 말씀하셨습니다. 예감이 좀 이상하잖아요. 수십 년을 아버지 얼굴도 못 봤고, 아버지 소리도 못해봤으니. 이상하지만 그대로 말을 안했습니다. 세월이 지나 학교를 다니다가 잠시 고향을 왔었는데 공무원 시험을 치려고 했습니다. 직장 구하기가 힘들어서. 부면장이 소문을 듣고 어느날 우연히 차 한잔하면서 "노 군, 당신은 공무원 하면 안 된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전 그렇게 생각을 했죠. 그러니 "그런 일이 있다"고만 했습니다. 그래서 이게 참 저도 가슴에 와닿는 부분이 있는 거죠. 어머니도 그런 얘길 했지, 얼굴도 못 봤지. 주변에서는 아버지가 어떻게 됐다는 걸 모르면서도, 죽었는지 살았는지, 분명 뭔가 이상하다. 그래도 사는 게 바쁘다 보니 스쳐 지나갔습니다."

- 명예 회복 시기와 계기는 언제쯤입니까?

"나도 아버지가 있었으면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TV에 자막으로 진실화해위원회가 2005년 생겼고 1950년 이후 행방불명자 신고를 하라고 떴습니다. 시기가 그때 마지막 날짜를 택해서 신고를 마지막 날했죠. 그전에 형님에게 전화로 물었죠. "형님, 이걸 신고해야 됩니까" 하니까 "할 필요 없다. 어떻게 됐는지도 모르는데 소용이 있겠느냐"하시고, 두 번째 전화를 하니까 "니 알아서 해라"고 하셔서 이건 아니다 싶어 마지막 날 부산 남구청에 가서 신고를 하게 됐습니다."

- 2009년 피학살자 명단에 아버지 성함이 포함된 것을 확인합니다.

"진실화해 거기 신청을 하면, 위원회 근무하는 사람들이 남구청 회의실에서 만나자고 해서 갔죠. 어떻게 됐느냐 물어서 그대로 들은 바를 이야기했고, 2009년 2월 28일, 날짜는 정확합니다. 진실화해 도장이 찍혀서, 진실규명결정서라는 것을 받았습니다. 딴 건 없고, 그냥 확인. 죽였다는 확인. 그런 이야기죠. 언제 죽였다, 어떤 재판이 있었다 그런 것도 없이 A4 용지에 신청자 누구, 사건번호 몇 번, 이 사실은 진실 규명 되었습니다라는 도장만 찍혀서. 이건 참 뭔지, 먹먹하잖아요. 누가 봐도 언제 아버지가, 내가 알기로는 아버지가 1950년 7월 초중순 부역하러 삽 등을 들고 면 소재지인 수정부로 갔다고요. 그게 마지막. 아마 대부분 사람이 그랬을 겁니다. 그 길로 사람이 행방불명이 됐죠. 그러니 가족들이 찾을 것 아닙니까. 전혀 소식도 몰랐습니다. 경찰서를 가도 모른다고 하니까 답답할 노릇 아니겠습니까."

- 현재 추정하는 경남지역 피해자 수와 유족회 현황은 어떻습니까?

"마산지역은 1950년 직전 마산형무소에 갇혔던 사람이, 1960년 즈음 국회 특별조사반이 온 적이 있는데 마산지역 유족, 마산교도소 근무했던 교도관 등 증언에서 1681명이 갇혔고, 대부분 괭이바다에서 학살당했다는 증언이 있었고, 그리고 김해, 창원군 사람이 700명가량. 현재 창원시 기준으로 김해 진영까지 포함하면 2300명가량 희생자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경남 전체로는 1960년 숙부님이 전국유족회 회장을 할 때 규명활동을 하면서 내각에 27만 명 희생됐다고 보고한 문서가 나옵니다. 명단은 없죠. 많은 희생이 있었다고 추정할 따름입니다."

※ 노치수 회장이 언급한 '숙부님'은 마산지역을 대표하는 노동운동가이자 진보정치인 고 노현섭(1920~1991) 씨 입니다. 고인 행적은 다음 기사를 참고하기 바랍니다.
50년 만에 벗은 용공 누명
☞ 시대의 아픔 밝히다 희생당한 역사 바로잡았다

 

▲ 노치수 한국전쟁전후민간인희생자 경남유족회장. /손유진 기자
▲ 노치수 한국전쟁전후민간인희생자 경남유족회장. /손유진 기자

- 앞서 잠깐 언급했지만 정부는 유족을 관리(?)했습니다. 피해자 가족으로 산다는 것, 서러운 세월이었겠습니다.

"제가 당시 연좌제라는 게 뭔지 몰랐다. 성인이 되고 사회활동을 하면서 연좌제를 알게 됐다. 예를 들어, 11살 많은 형님이 있는데 마산고를 나와서 사관학교 가려니까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들은 게 있고. 아버지 때문에 복잡한 사연이 많습니다. 숙부도 형님이 죽고나니까 규명하려고 활동을 했다고요. 박정희 군사 쿠테타 이후 잡아가고 곤혹을 치르다보니 연좌제 피해가 형님, 사촌형님 등 다들 받았다. 직장에 들어가기 힘든, 공무원 시험 못 친다라는 단적인 예. 큰 형님은 사관학교 합격하고 면접에서 떨어지는 경우, 다 그런 게 아니겠느냐 정리가 된다. 숙부가 그렇게 된 것도 이유겠지만 아버지가 원인이다. 아버지도 결국 국가에서 딱지 붙여서 죽였으니. 촌에 가면 단위농협이 있습니다. 단위농협에 여성부장이라고 있고요. 또 이장 중에도 파출소나 경찰서, 이런 데서 심어놓은, 명예직 경찰관이 있는데 경찰에 정보를 전해주는 역할이다. 저도 촌에 있을 때 20대 후반 즈음 이야기 듣기로 "노치수 당신은 집안에 빨간줄이 있다"고 파출소에서 어떤 이야기가 있었나보더라. 파출소장도 집에 가끔 오고, 감시와 감독이라고 하죠."

인터뷰 중인 노치수(가운데) 한국전쟁전후민간인희생자 경남유족회장. /손유진 기자
▲ 인터뷰 중인 노치수(가운데) 한국전쟁전후민간인희생자 경남유족회장. /손유진 기자

- 이번 판결을 계기로 국가와 사회가 짊어져야 할 과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진실 규명을 했고, 무죄 판결도 나왔으니까 천만다행이지만, 많은 분이 억울하게 돌아가셨고 희생 당한 유족이 있습니다. 2005년 과거사법으로 규명된 사람이 1만 명도 안 됩니다. 특별법이 국회 법사위 계류 중인데, 이번 임시국회 때 꼭 통과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많은 사람이 아직 진실 규명이 된 후에도 옛날 습성, 어떤 피해의식 때문에 제대로 이야기를 안 하고. 소송 하자고 말해도 무슨 소용이냐며 전화를 끊는다거나. 피해의식 때문이거든요. 제가 살면 얼마나 살겠습니까. 자식 된 도리로 진실 규명을 해야하는 것 아니냐. 피해의식 벗어나서 같이 활동해서 특별법 만들면 적극적으로 신청해서 진실 규명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유족 대표로서 회장님 계획도 말씀 부탁합니다.

"매년 추모제를 시 보조금 지원과 회비를 더해서 진행하는데, 어디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를 모릅니다. 자료가 없어서. 무덤도 없습니다. 심지어 괭이바다에 많은 사람을 수장했으니. 무덤도 없는 희생자 이름 석 자라도 새기는 위령탑이라도 세우면 좋겠다 해서, 각 지자체에 요구를 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함안에는 위령비가 세워졌고, 올해는 진주와 거제, 김해는 예산이 책정된 것으로 압니다. 경북은 10군데 정도 위령탑 다 세우고 있거든요. 우리도 그렇게 시에 자꾸 요청을 하고 있습니다. 매년 추모제를 지내는데 아무리 행사 때 울고불고 해봐야 소용도 없고 이런 부분을 재단을 설립해서 후손 등에 도움이 되도록 하자고 하는데 정부에서 아마 해야하지 않겠느냐 판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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