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령 오래된 거목 31그루 곳곳에
종류·위치마다 색다른 운치
충무공·가직대사 이야기도 간직

남해 돌창고프로젝트 최승용 대표와 지난해 여름에 만났을 때 남해 소중한 풍경을 기록하는 일을 하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고는 최근 <남해 보호수>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쓰리피플이라고 역시 돌창고프로젝트에서 운영하는 출판사에서 발간했지요. '남해 보존지도 프로젝트' 첫 번째 결과물입니다. 여행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지만 그 가치를 인정하고 보존해야 한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기록하겠다는 뜻으로 진행하는 겁니다. 앞으로 다랑논, 소규모 항구, 마을 저수지, 마을 우물 같은 걸 소재로 계속 작업을 할 계획입니다.

◇이순신 장군이 점심을 먹었던 나무 그늘

<남해 보호수>에는 남해군에 있는 보호수 31그루가 담겨 있습니다. 보호수란 보통 경관이 훌륭하거나, 번식용으로 필요하거나 학술적으로 참고하기 위해서 지방산림청이나 시·도지사가 지정하는 나무를 말합니다. <남해 보호수>에 담긴 나무는 대개 이렇게 수령이 오래된 마을 당산나무입니다. 마을 어르신에게 여쭈면 아이들 놀이터이기도 했고, 동네 쉼터이기도 했고, 신앙의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남해를 통틀어서 제일 인상적이다 싶은 보호수는 단항마을에 있는 왕후박나무입니다. <남해 보호수>에는 제일 마지막에 소개됐습니다. 삼천포에서 창선·삼천포대교를 지나면 단항사거리가 나옵니다. 여기서 직진하면 창선교를 지나 지족마을이고요, 사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바로 단항마을입니다. 이 마을에 유명한 노거수(老巨樹)가 하나 있는데, 이게 바로 왕후박나무입니다. 후박나무는 경상, 전라 지역 섬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나무입니다. 왕후박나무는 이 후박나무의 변종인데 창선도 외에 진도, 홍도에도 비슷한 게 있다고 하네요.

▲ 남해 창선면 단항마을 왕후박나무.
▲ 남해 창선면 단항마을 왕후박나무. /이서후 기자

왕후박나무는 바닷가와 마을 사이 들판에 있습니다. 풍채가 좋아 멀리서 봐도 두드러집니다. 500살이 넘은 나무로 현재 천연기념물 299호입니다. 특히 잎이 무성한 계절에 가면 그 위엄이 도드라집니다. 높이가 9.5m, 뿌리에서 11개 가지가 뻗어 있는데 긴 것은 10m가 넘습니다. 단항 왕후박나무는 옛날부터 마을 주민들이 매년 섣달그믐(음력 12월 30일)에 제사를 지내던 당산나무이기도 합니다.

단항 왕후박나무에는 전설이 두 가지 깃들어 있습니다. 하나는 나무 탄생 설화입니다. 500여 년 전 단항마을에 늙은 부부가 살았는데, 매일 고기를 잡아 생계를 꾸렸습니다. 하루는 할아버지가 큰 물고기를 잡았는데, 물고기 뱃속에서는 이상한 씨앗이 하나 나왔습니다. 이걸 집 앞에 심었더니 지금의 왕후박나무로 자랐다는 이야기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순신 장군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 마을에 원래 대나무가 많았습니다. 1598년 노량해전 당시 이순신 장군이 이 마을에서 대나무와 짚을 구해 배 위에 싣고 전투 중에 불을 질렀습니다. 보통 대나무를 안 쪼개고 그냥 태우면 마디가 터지면서 '펑펑' 하고 소리를 냅니다. 이걸 왜적들이 대포 소리로 알고 도망을 쳤다고 합니다. 이 전투 후에 이순신 장군이 왕후박나무 아래서 점심을 먹고 쉬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나무를 '이순신 나무'라고도 부릅니다.

◇천혜의 나무그늘과 풍성한 공간감

남해를 삼자의 섬이라고 합니다. 유자, 치자, 비자나무가 많다는 뜻입니다. 남면 면사무소 소재지 근처 죽전마을에 있는 비자나무는 남해에 있는 비자나무 중 가장 오래된 나무입니다. 수령이 620년, 높이가 18m, 둘레가 7m 정도로 경상남도기념물 제200호로 지정돼 있습니다. 나무는 동네 앞을 흐르는 개울을 지붕처럼 덮고 있습니다. 직접 가서 살펴보니 여름에 나무 아래 개울가에 있으면 천국이 따로 없을 것 같습니다. 나무뿌리 근처에 우물처럼 만들어 둔 게 있는데 옛날부터 여기서 나오는 물을 마시면 무병장수한다는 이야기가 전합니다.

▲ 남해 남면 죽전마을 비자나무.
▲ 남해 남면 죽전마을 비자나무.

남해군 설천면 문의마을에 있는 팽나무는 위치상 공간감이 대단합니다. 수령은 150년으로 보호수 중에는 젊은 축에 속합니다. 이 팽나무는 남해양떼목장 가는 길목에 있습니다. 그러니 산 위로 난 가파른 도로를 계속 올라가야 합니다. 팽나무는 마을에서 조금 떨어져 있습니다. 나무의 공간감을 이해하려면 위치를 좀 구체적으로 설명해야겠습니다.

설천면 면사무소 소재지 앞이 남해에서 꽤 너른 들판입니다. 바닷가까지 논이 가지런하게 뻗어나갔는데, 그 들판의 뒷산 능선 끝에 나무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구도냐면 나무가 있고요, 나무 너머로 보이는 풍경이 한참 아래 있는 들판과 바다입니다. 그 사이에 아무것도 없어요. 마치 절벽 끝에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있는 것 같아요.

◇가직대사 전설을 품은 소나무들

남해군 서면 남상마을, 중리마을, 노구마을 도로변에 소나무가 한 그루씩 있습니다. 모두 270년 됐는데, 일명 '가직대사 삼송'이라고 불립니다. 가직대사는 조선 영조 임금 때 남상마을에서 태어난 스님입니다. 어려서부터 비범하기로 소문이 자자했는데, 도술을 부리는 설화가 꽤 있어요.

이분이 조선시대에 남상마을과 중리마을, 노구마을에 소나무를 심으면서 '이곳에 길이 날 것'이라고 예언을 했습니다. 놀랍게도 지금 이 소나무들은 모두 77번 국도변에 있습니다. 그래서 후대 사람들이 '가직대사 삼송'이라고 부르며 잘 보호하고 있습니다. 여기는 차로 지나면서 쭉 살펴보시면 되는데, 특히 노구마을에 있는 소나무는 굉장히 멋있게 생겼어요. 길가에 차 세우시고 소나무 안으로 쑥 들어가 보시면 그 가지가 뻗은 모양이 엄청 역동적이에요. 이야~ 하고 감탄사가 나오실 겁니다.

▲ 남해 서면 노구마을 소나무.
▲ 남해 서면 노구마을 소나무.

<남해 보호수>에는 없지만, 기억나는 보호수가 하나 더 있습니다. 남해군 고현면 갈화마을에 있던 느티나무입니다. 천연기념물 제276호로 그늘이 아주 넓어 주민들이 와서 쉬기도 하고, 마을 회의를 열기도 했던 나무입니다. 지금은 죽고 없습니다. 대신에 주민들이 그 곁에 새로 심은 느티나무가 차곡차곡 자라고 있습니다. 이 나무가 앞으로 또 몇백 년이 지나면 다시 후손들에게 시원한 그늘이 되어 줄지도 모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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