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들 마을 대항으로 한해 풍흉 점치던 농경사회 유풍
삼국시대 이전부터 전래…인디언·중국·몽골인도 즐겨

해마다 설날이면 서랍 속에서 잠자던 윷 한 벌이 빛을 본다. 찾아온 친척들과 거실에 둘러앉아 방석을 깔고 윷을 쏟아낸다. 그 옆에 말판을 펴서 각각 편을 나누어 말의 색상을 정하고 누가 먼저 윷을 잡을지 '가위바위보' 한다.

다른 놀이는 선을 잡는 게 유리한데 이 윷놀이는 사정이 다르다. 먼저 출발하면 후발 주자에게 잡힐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운이 좋으면 잡히지 않고 쭉쭉 뻗어갈 수 있다. 윷놀이는 대체로 실력보다 운에 의해 판가름 나기 때문에 공평하다 하겠다. 말판에서 잡히지 않고 가장 짧은 길로 한 바퀴 돌아오면 가장 운이 좋은 것이다.

▲ 지난해 함양군 한 어린이집 원생들이 설을 앞두고 윷놀이를 하며 즐거워하는 모습. /함양군
▲ 지난해 함양군 한 어린이집 원생들이 설을 앞두고 윷놀이를 하며 즐거워하는 모습. /함양군

첫 번째 모가 나와 '사리'가 되면 한 번 더 던질 기회가 생긴다. 거기서 운 좋게 걸이 나오면 '방'에 안착한다. 여기서 다음 판에 윷이 나와 '참먹이'를 통과해 나오면 끝난다. 12밭 만에 나오는 길이 가장 짧다. 의미상으로 낮의 길이가 가장 짧은 동지에 해당한다.

반대로 가장 긴 길은 모를 지나 '뒷모' '찌모'를 돌아 출발점인 참먹이를 통과하는 길이다. 21밭을 거쳐야 한다. 하지에 해당한다. 그 중간에 17밭 만에 나오는 길은 춘분과 추분에 해당한다.

말판에서 한 바퀴 돌아오는 과정을 하루 여정으로 비유한 것을 보면, 놀이 하나에도 철학을 담은 조상들의 지혜가 엿보인다. 말이 말판을 한 바퀴 도는 동안 잡혀서 새로 시작하기도 하고 같은 편을 업어서 함께 가기도 하고 때로는 한 걸음씩 가기도 하고 때로는 일이 잘 풀려 훌쩍 건너 뛰어가기도 하니 하루 나절 일어나는 온갖 일들을 놀이판에 녹여낸 게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윷놀이 판의 생소한 용어들 = 윷놀이는 매년 한두 번 정도 두는 놀이지만 우리에게 아주 익숙하다. 하지만 생소한 용어가 많다. '사리'라든지, '밭'이라든지, '공중말' '동이' '벌윷' '사위' 등등.

사실 '윷'이라는 말도 그 어원을 알고 보면 아하! 싶다. 윷이 '숫'에서 변했다는 증거는 조선 초 <훈몽자회>에서도 확인이 된다.

그렇다면 명확한 근거는 없지만, 윷가락과 숟가락의 어원이 같은 건 아닐까 추측도 가능하다. 윷의 모양새가 한쪽은 평평하고 반대쪽은 둥글다. 평평한 쪽은 땅을 의미하고 둥근 쪽은 하늘을 의미한다.

'사리'라는 말은 윷이나 모가 나와 한 번 더 던지는 기회를 말한다. 사리 대신 '동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밭'은 흔히 윷놀이하면서 한 칸 두 칸으로 표현했던 그 점을 이르는 말이다. 말판에서 밭은 총 29개로 이루어져 있다. 이번 설엔 가령 개가 나왔다면 "두 밭 앞으로!" 하고 '고급용어'를 써보자.

그리고 '사위'는 도·개·걸·윷·모 다섯 가지 결과를 두고 이르는 말이다. "이번 사위에 개가 나오면 우리가 이긴다!" 큰소리도 쳐 보고. 말판 없이 말을 놓는 '공중말' 윷놀이도 도전해보면 어떨까. 윷을 던져 나온 사위대로 말을 놓아야 할 텐데 말이 어느 밭에 있는지 기억을 해야 하니 어지간한 기억력으론 쉽지 않을 듯하다.

영화 <신의 한수>에서 바둑판 없이 기억만으로 돌을 놓는 '맹기바둑' 장면이 떠오른다. 공중말은 '겅궁(건궁)윷말' '벌윷' 등으로도 불린다. 벌윷이 공중말의 의미로 쓰이는 지역은 경북 안동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벌윷'이라 함은 던져서 윷판을 벗어난 윷을 가리키기도 한다.

▲ 대형 윷을 던지며 즐거워하는 아이. /경남도민일보 DB
▲ 대형 윷을 던지며 즐거워하는 아이. /경남도민일보 DB

◇윷놀이, 언제부터 어떻게 시작됐을까 = 해마다 설날이면 박물관이나 창원의 집 같은 곳에 가서 아이들과 민속놀이 체험을 했던 터라 며칠 전 창원역사민속관을 찾았다.

전상훈 학예사는 "문헌을 보면 삼국시대 이전부터 전해졌다고 하며 일본에까지 전해져 이와 비슷한 놀이가 전해지고요, 인도와 북아메리카 인디언도 우리나라 윷놀이와 비슷한 놀이를 즐긴다고 합니다"라고 얘기한다.

미국의 인디언들이 윷놀이를 즐겼다는 얘길 듣고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미국 인류학자 스튜어트 컬린(1858∼1929)이 쓴 책에 그 내용이 삽화와 함께 기록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미국 인디언들은 아주 오래전 시베리아에서 건너간 사람들이라던데. 이 생각에 미치니 윷놀이가 한반도에만 있었던 건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의 저포놀이도 윷놀이와 비슷하다고 한다. 중국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놀이 방법이 다름에도 윷놀이를 저포놀이로 표현한 문헌도 있다.

이색의 <목은집>에서 '저포희'라고 썼다. 조선 때엔 윷놀이를 사희(柶戱)라고도 했다. 여기서 사(柶)란 숟가락을 의미하는데, 윷가락이 숟가락임을 더욱 확신하게 하는 사례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도·개·걸·윷·모가 각각 돼지·개·양·소·말을 뜻하는데 이게 부여의 부족장 마가·우가·구가·저가에서 비롯됐다는 설도 있다.

또 몽골에는 양의 복숭아뼈로 만든 놀잇감인 '샤가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 샤가이 하나에 네 개의 경우의 수가 나온다. 각각 말·낙타·양·염소를 나타낸다. 주사위를 던져 놀이하기도 하고 샤가이 네 개를 한꺼번에 던져 점을 치기도 한다.

◇이왕 노는 거 윷점도 볼까 = 민속놀이 중에 두 마을이 대결을 펼쳐 이긴 쪽 마을에 풍년이 든다는 얘기는 흔하다. 줄다리기도 그렇고 고싸움, 쇠머리대기, 차전놀이도 다를 바 아니다. 윷놀이도 마을 대항이면 이긴 쪽에 풍년이 든다는 속설을 품고 있다. 전상훈 학예사가 설명을 덧붙인다. "윷놀이는 단순한 오락이기도 하지만 본래의 뜻은 농민들이 윷놀이로 농사의 풍흉을 점치던 고대 농경사회의 유풍이었습니다."

윷으로 점도 본다. 윷을 세 번 던져 나온 수로 점을 치는 방식이다. 도는 1, 개는 2, 걸은 3, 윷과 모는 4로 정하고 세 번 모두 도가 나오면 111, 도개걸이 나오면 123, 이런 식으로 괘를 정한다. 이렇게 했을 때 64괘가 나오는데 괘에 따라 정해진 내용이 자신의 운수가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111(도도도)이 나왔을 때 내용은 '어린아이가 자비로운 엄마를 만났다'로 행복한 일이 많이 생길 운수다.

반대로 213(개도걸)이 나왔다면 '활이 화살을 잃는다'란 건데, 사소한 실수에 큰일을 망칠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표로 소개한 윷점 내용은 18세기 말 유득공이 지은 <경도잡지>에 실린 것이다. 해석 난에 '오늘의 운세'처럼 재미있게 덧붙여 보았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