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처음 본 어른들의 놀이
적진 점령 상상하며 가지고 놀아

아마 1983년으로 기억됩니다. 불과 제 나이 여덟 살이었지요. 학교를 파하고 나면 산으로 들로 뛰어노는 것이 제 일상이었습니다.

제 고향은 서울이지만 서울이라고 다 같은 대도시의 풍경을 하고 있는 건 아니었습니다. 서울 외곽은 오히려 전원일기에 나올 법한 시골 마을이라고 하는 게 적절할 듯싶습니다. 라디오 청취율이 흑백텔레비전 시청률보다 높았고, 대다수의 이웃은 논밭을 거름 삼아 아이들이 무탈하게 자라는 것을 수확의 기쁨으로 여겼지요. 제대로 맞춰지지 않은 안테나와 이어진 텔레비전에서는 일본 총리 방문, 이웅평 대위 귀순, 이산가족 찾기, 소련 상공에서 대한항공 격추 등의 흑백화면들을 보여주었습니다.

당시 아이들은 지금은 전통 놀이라 불리는 술래잡기, 말뚝박기, 비석치기, 구슬치기, 딱지치기, 고무줄놀이 등을 즐기며 하루해를 보내곤 했습니다. 어쩌면 지금 아이들이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않고 노는 것이 몇십 년 후에는 이렇게 전통 놀이로 바뀔지도 모르겠지요.

지금과 마찬가지로 어른들의 놀이는 별로 많지 않았습니다. 술을 마시며 젓가락 장단에 맞춰 노래 부르기, 명절에 즐기는 윷놀이와 고스톱, "장군! 멍군! 차·포 떼 줄게!"로 기억되는 장기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땡볕이 내리쬐던 어느 여름날, 어른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아다리~아다리!" 하며 작은 돌멩이를 나무판에 내리꽂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호기심에 어른들 사이를 비집고 그것이 무엇인가 들여다보았습니다. 한 어른은 검은 돌멩이를 쥐고 연신 한숨을 토하고 있었습니다. 그보다 나이가 적은 어른은 그 앞에서 연신 싱글거리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장기와는 다른, 뭔가 전혀 다른 어른들의 놀이, 바둑이었습니다. 바둑. 곁에서 이를 지켜보던 다른 어른이 지나는 말로 "바둑 끝났네, 끝났어" 하는 말을 듣고 저는 그것이 비로소 바둑인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우리 집에도 바둑판이 생겼습니다. 나무를 잘 다루시던 할아버지께서 손수 두툼한 은행나무로 된 바둑판을 만들어 오셨기 때문이었지요. 바둑을 두러 우리 집에 온 여러 어른은 바둑은 잡기라 하시며 제가 보는 것을 꺼리셨습니다. 아마 지금의 부모들이 스마트폰 게임에 중독될까 봐 자녀들에게 스마트폰을 사주고도 노심초사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를 비롯해 부모님이 하라는 것과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모두 경험해보려는 성향을 지닌 아이들은, 오히려 더 호기심이 솟아나기 마련이랍니다.

저는 어른들이 없을 때 바둑판과 바둑알을 가지고 혼자 상상 속의 전쟁놀이를 하며 놀았습니다. 또한 반공정신이 투철한 아이였기에 바둑알과 장기의 기물을 튕기며 적의 고지를 점령하는 놀이를 했던 것이지요.

흑백텔레비전에서는 세상을 흑백으로만 보여주었거든요. 흑백으로 보이는 세상은 옳고 그름이 분명했습니다. 상대를 최고조로 비난하고 싶을 때 한마디면 족하였죠.

"당신 빨갱이 아냐?"

그러면 상대는 순식간에 머릿속이 새빨개져서 얼굴까지 울긋불긋해지기 마련이었거든요. 미얀마 아웅산 묘역에서 폭탄테러 사건이 나서 자정이 넘도록 추모 영상이 방영되었고 세상은 그 어느 때보다 흑백이 선명하던 시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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