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방에게 맞춘 '친절한 말'드물어
인간 존중·배려의 마음 담은 표현을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며 살고 있는가?' 이 물음에 남들보다 더하지는 않아도 남들보다 덜하지는 않다고 자부해온 나로선 꽤 부끄러운 일이 있었다.

얼마 전, 청각장애인을 만났을 때 일이다. 나의 질문을 수화 통역사가 전하고, 그의 대답을 수화 통역사를 통해 듣는 인터뷰 자리였다. 몇 가지 질문을 이어받으며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비장애인과 장애인이 함께 살아가는 사회가 되기 위해선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나의 질문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비장애인도 우리 언어를 좀 배워서 대화를 나눴으면 좋겠어요."

예상치 못한 답변. 순간, 아차 싶었다. 인터뷰하러 가는 길에 인사 정도는 수화를 배워서 가야 하는 건 아닐까, 잠시 스쳤던 생각을 실행에 옮기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웠다. 외국 사람을 만나면 영어부터 꺼내는 내가 왜 청각장애인의 언어는 머릿속에 새기지 않았던 걸까? 내 마음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오래 묵은 차별의 감정을 발견한 순간이었다. 장애인은 도와줘야 할 약자로만 생각했을 뿐, 나와 동등한 인권을 가진 시민으로 존중하지 못했음을 부끄럽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배려하지 못하는 언어들. 한번 초점이 맞춰지니 몇 가지 경험이 떠오른다. 여든이 넘은 엄마와 함께 병원에 갈 때마다 느꼈던 불안하면서도 불쾌했던 순간들. 그것 또한 배려받지 못한 언어에서 비롯되었음이 생각났다. 귀가 잘 안 들리는 엄마의 병명을 귀가 성한 나도 잘 안 들릴 정도로 나지막하게 말하는 의사. 젊은이도 알아듣고 움직이기엔 숨이 가쁜 접수처 직원의 사무적인 목소리. 얼마나 더 기다려야 되는지 순서가 궁금한 노인을 귀찮아하는 간호사의 말투. 왜, 그들은 노인을 배려하는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걸까? 엄마와 함께 병원에 갈 때마다 분노했던 기억이 난다. 어디 병원뿐이랴. 은행도 식당도 동사무소도 노인을 배려하는 친절한 언어는 드물다.

상대의 처지와 조건에 맞는 친절한 언어. 좋은 기억이 하나 있다. 몇 해 전 창원지방법원 진주지원에 갔을 때다. 유달리 촌에서 올라온 할매 할배들이 많았다. 마치 시골 버스정류소 같은 느낌이랄까. 일단 방청석이 시끄러웠다. 당신의 귀가 안 들리다 보니, 남의 귀도 잘 안 들릴까 봐 큰소리를 내는 노인이 많았기 때문이다. 느릿느릿 슬로 모션으로 증인석으로 나가는 거동이 불편한 노인부터, 그 노인을 향해 큰 소리로 빨리 나가라고 참견하는 성질 급한 노인까지. 내가 익히 아는 엄숙한 법원의 분위기가 아니었다. 이러다 큰일 날 텐데….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못하는 법정 분위기를 알고 있는 나는 내심 어르신들의 행동이 걱정되었다.

하지만 내 걱정과는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판사가 더 큰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었다. "어르신! 제 말이 잘 들립니까?" 증인석에 앉은 귀가 어두운 노인을 위해 법정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물었다. 보청기를 깜박하고 안 끼었다는 노인의 말에 법원 직원을 불러 다시 한번 물어보는 수고도 아끼지 않았다. "걱정 말고 얘기해보이소!" 행여 겁이 나서 말을 못 하는 건 아닐까, 사투리로 편안함을 주기도 하고, 안타까운 사연에 깊이 고개까지 끄덕이며 공감해주던 판사. 지금도 그의 친절한 언어를 잊을 수 없다.

모든 언어는 상대가 있다.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은 언어로 표현된다.

장애인, 노인, 아동, 외국인 노동자…. 사회적 약자에 대한 내 마음은 어떤가? 찬찬히 들여다보고, 인간 존중의 가치를 새해에는 배려의 언어로 표현해야겠다. 그들을 생각하는 내 마음을 언어에 담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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