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고통 속 사람들과 함께하는 예수
그 발걸음에 나를 맞추어야 의미 있어

성탄절 분위기가 점점 가라앉고 있는 것은 교회들이 개판을 쳐서 그런지, 아니면 경기 탓인지, 또 다른 이유가 있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전에 더 어려웠던 상황들을 고려한다면 꼭 경기 탓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다른 이유가 있다 하더라도 교회가 사회로부터 지탄받고 있는 이유보다 더 크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성탄절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교회는 기뻐하고 즐거워하기보다는 더욱 겸손하게 어디에서부터 빗나가기 시작했는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 교회가 심히 어려운데 비판보다 격려가 필요하다고 할지 몰라도, 격려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는 것은 교회가 돌아서야 할 타이밍을 놓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비판이 닫힌 사람들에게는 부정적이어도 열린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긍정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니라 비판이 또 다른 길을 여는 것이라면 약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성탄절의 빛이 바래기 시작한 것이 교회 탓이라고 말하기는 쉬워도 정작 그것이 무엇인지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조심스럽게 말하자면 그동안 교회가 성탄절을 예수님에게 맞추려 한 것이 아니라 교회에 맞추려 했고, 신자들도 예수님에게 자신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예수님을 맞추려 했습니다. 주객이 바뀌는 이 엄청난 결과는 그동안 예수님이 누구인지에 대한 질문을 진지하게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고, 이 고백 위에 교회가 세워졌기 때문에 이 고백은 교회와 신앙의 근거입니다. 그러나 이 고백이 교리 안에 갇혀 버리거나 우리들의 삶 속에서 예수님이 누구인지 모호하다면 예수님이 빛과 생명과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 속에서 교회의 언어가 아니라 세상의 언어로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말해야 하고, 세상 사람들과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열려 있는 교회라야 희망이 있습니다.

신구약 성서 전체가 예수님에 대한 증언이지만 저에게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분이시고(막2:17), 세리와 죄인의 친구이시고(눅7:34), 보잘것없는 이들을 높이시고 배고픈 사람들을 배부르게 하시는 분이십니다(눅1:52-53). 이것을 종합하면 예수님은 약하고, 힘없고, 가난하고, 밀려나고, 고통받는 자들과 뗄 수 없는 분이시고, 성탄의 의미 또한 나를 위한 성탄절이 아니라 내가 이 모든 이들과 함께하려는 예수님의 가난 속에 나를 두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오시는 예수님을 나에게 맞추려는 것은 내가 부해지려는 것이지만 오시는 예수님에게 나를 맞추려는 것은 내가 가난해져서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려는 것입니다. 내가 부해지려는 성탄절은 사람들이 외면해도 내가 가난하면 가난해질수록 죽은 예수님이 살아나고, 잃어버린 믿음이 회복될 것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5:3)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