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전 인명구조 중 숨진 해군 순직비 마진터널에
진해 시 승격 50년 기념해 장복산에 조성된 조각공원

지금 창원시 진해구 장복산 옛 마진터널 앞에 서 있습니다. 커다란 윙보디(날개처럼 양쪽으로 짐칸의 문이 열리는 화물차) 탑차 한 대가 길을 막고 서 있습니다. 너무 높아서 터널을 못 지나가는 모양입니다. 결국, 차를 돌려서 진해 쪽으로 내려가는군요. 마진터널은 1985년 장복터널이 개통하기 전까지 창원·마산과 진해를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였습니다. 여기만 막으면 육로로는 진해로 들어갈 수 없었지요. 해군 기지 도시 이미지에 딱 들어맞는 모양새지요? 옛날에는 터널 앞에 검문소가 있어 군인들이 항상 지키고 있었습니다.

장복터널이 생기고 나서 한가해진 마진터널이지만 그래도 적당히 낡아서 제법 운치가 있어 지나다니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터널 조명을 LED로 바꾸고 나서는 그 운치가 싹 사라져버렸습니다. 안전과 효율을 위해서라는 건 이해하지만, 터널을 다시 보며 아쉬운 한숨을 내쉽니다.

▲ 옛 마진터널 진해 방향 출입구 왼쪽에 있는 순직비. /이서후 기자
▲ 옛 마진터널 진해 방향 출입구 왼쪽에 있는 순직비. /이서후 기자

◇1979년 태풍 주디에 희생당한 영웅들

최근에 발간된 진해 여좌동 할머니들이 만든 동네 홍보 책자 <여좌동 이바구 할매>(2019년 11월)를 보고 문득 여좌동을 제대로 둘러보고 싶어졌습니다. 이 책자는 진해노인종합복지관 이경진 사회복지사가 여좌동 할머니들과 함께 10주 동안 진행한 여가증진 프로그램의 결과입니다. 문체로 봐서 대부분 내용을 사회복지사가 적은 것 같지만, 그 속에 담긴 할머니들이 살아온 이야기는 진짜인 것 같습니다.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따라 제일 먼저 찾은 곳이 옛 마진터널입니다.

마진터널 진해 쪽 출입구 왼편에 순직비가 서 있습니다. 2016년 '그 장소 그 후'란 코너로 한 번 소개했었지요.

순직비에는 청동으로 해군 마크가 있고 그 위에 해군하사 전판수·윤병옥, 해군병장 김영식·박기서·서안식, 해군상병 나상경·장경인, 해군일병 이남호 8명의 이름이 있습니다. 1979년 8월 25일 제8호 태풍 '주디'가 경남 지역으로 상륙했을 때 터널 앞 검문소에 있던 군인들인데, 마진터널 안 사람들을 구하려다 산사태에 휩쓸려 희생됐습니다. 이날 마진터널에는 도보통행자와 차량이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 태풍으로 전국에서 107명이 목숨을 잃어서 지금도 우리나라 최악 자연재해 중 상위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책에 보면 황선자 할머니가 그때 상황을 기억하고 계시네요.

"아이고~ 말도 마이소~ 그때 비가 얼마나 많이 왔던지…. 나도 우리 아들 잃을 뻔했다 아입니꺼. 비가 억수같이 내려 가지고 여좌천이 불어나서 우리 아들 눈 깜짝할 사이에 물에 휩쓸려 내려가서 애들 아부지가 저~ 밑으로 뛰어내려 가서 겨우 끌어올렸었지…. 어휴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아찔합니더."

▲ 장복산조각공원 안에 있는 투박한 라이온스클럽 사자상. /이서후 기자
▲ 장복산조각공원 안에 있는 투박한 라이온스클럽 사자상. /이서후 기자

◇장복산 그 조용한 품속에서

옛 마진터널 가는 길은 좋은 드라이브 코스입니다. 안민고개 가는 길과 달리 적당한 경사, 우거진 숲과 알맞은 곡선 도로로 운전하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길 초입에 장복산조각공원이 있습니다. 진해시 시절 시 승격 50주년을 기념해 만든 겁니다. 공원 안에 작품이 24점, 일일이 음미하기에 너무 촘촘하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조각공원이라고 이름을 붙였더라도 조각 설치는 최소화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거창한 작품들 사이를 거닐다 보니 오히려 공원 내 장복교 앞 투박하게 서 있는 라이온스클럽 사자상이 더 재밌어 보이기도 합니다.

사실 장복산조각공원은 일 년에 몇 번씩은 가보는 곳입니다. 언젠가 부슬부슬 봄비가 내릴 때 공원에 우두커니 서 있어 본 적 있습니다. 차분한 빗소리가 숲 속에 가득 차 마치 나 자신도 나무가 되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올해 3월에 조각공원 주변으로 창원편백치유의숲이 만들어졌더군요.

조각공원 주변은 벚꽃 명소이기도 하죠. 도로 주변에 있는 벚나무들은 진해 도심에 있는 것보다 더 웅장합니다. 진해 도심은 해방 후 일제 잔재라며 벚나무를 싹 베어냈다가 1970년대 새로 심은 것이고, 장복산 아름드리 벚나무는 일제강점기 때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라 하네요. 그래서 매년 군항제 인파를 피해, 밤에 이 벚꽃 길을 거닐곤 합니다.

▲ 따뜻하고 편안했던 여좌동 골목. /이서후 기자
▲ 따뜻하고 편안했던 여좌동 골목. /이서후 기자

◇오래된 동네를 거닐며

여좌천 주변은 바람이 찹니다. 그런데 바로 옆 동네 안으로 쑥 들어가니 문득 바람이 잦아듭니다. 여좌천 주변만 다녀봤지 동네 안으로 깊이 들어온 건 처음입니다. 느낌이 편안한 동네군요. 조용하고 따뜻하고 안정감이 있습니다. 왠지 그렇게 낡은 동네는 아닙니다. 도로포장도 깨끗하고, 비교적 최근에 지어진 집도 많습니다. 동네 곳곳에 공용주차장이 들어서 있습니다. 아마도 여좌천 주변이 벚꽃으로 유명한 관광지기 때문에 어느 정도 정비를 한 것 같습니다.

동네 안으로도 도로가 아주 넓네요. 거의 2차로 길입니다. 일반적인 주택가와는 뭔가 다릅니다. 도로만 보면 밀양 삼랑진역 옛 관사촌이 떠오릅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삼랑진역이 중요한 관문이어서 역무원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1927년에서 해방 때까지 역 주변에 계속 관사를 지었습니다. 이 관사촌 한가운데 가로세로로 난 도로가 일반적인 2차로 도로보다 훨씬 넓었거든요. 여좌동, 이 넓은 도로도 일제강점기에 새로 주거지를 만들면서 생긴 게 아닐까 싶습니다.

걷다가 진해역 철길까지 왔습니다. 진해역은 들르지 않고 바로 여좌천을 따라 반대로 올라옵니다. 오는 길에 진해여고 앞을 잠시 들릅니다. 이쪽 도로도 참 좋아하는 길입니다.

▲ 초겨울 여좌천 풍경. /이서후 기자
▲ 초겨울 여좌천 풍경. /이서후 기자

여좌천은 겨울이라고 해도 그렇게 쓸쓸하지는 않습니다. 벚나무는 거의 남김 없이 잎을 다 떨어뜨려 냈지만, 하천 주변으로 여전히 푸릇푸릇한 식물들이 잘 자라고 있거든요. 여좌천에 다리가 12개가 되고 다리마다 이름이 다 있다는 건 할머니들이 만든 책자를 보고 처음 의식하게 됐습니다. 3번째에 있는 로망스 다리가 제일 유명하죠. 사실 <로망스>란 드라마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로망스 다리에 대한 어떤 '로망'도 없습니다. 제가 가진 여좌천에 대한 로망이란 예컨대 이런 겁니다. 여좌천을 가득 채운 사람들을 피해 살짝 골목으로 빠져나온 어느 봄밤, 가정집 하얀 담벼락 위에 드리운 벚꽃 그림자들이 가만히 흔들리는 모습을 바라보는 즐거움 같은 거라고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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