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 교동·송현동 고분원형 보존 63호분 공개

약 1500년 동안 한 번도 도굴되지 않아 원형이 그대로 보존된 비화가야 지배자 무덤이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에서 처음 발굴됐다.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소장 박종익·이하 연구소)는 28일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사적 제514호) Ⅱ군 39호분과 주변 고분(창녕읍 교리 산5 일원)' 발굴조사 현장에서 63호분 매장주체부(시신을 안치하는 공간) 뚜껑돌을 들어 올리는 모습을 공개했다.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에는 약 250여 기가 분포하는데, 도굴된 흔적 없이 발견된 것은 63호분이 최초라고 연구소는 밝혔다. 무덤이 도굴되지 않은 까닭은 63호분 바로 위에 있으면서 나중에 축조된 39호분 봉토에 가려져 있었기 때문으로 추정했다.

▲ 28일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에서 공개된 63호분 내부 모습. /창녕군
▲ 28일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에서 공개된 63호분 내부 모습. /창녕군

무덤 위에는 길이 2m의 편평한 뚜껑돌 7매가 얹혀 있고, 점질토로 밀봉된 상태다. 매장주체부 내부에는 시신과 부장품을 매장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공간이 당시 모습대로 남아 있다. 봉토 표면 등에는 점토 덩어리를 바른 흔적이 온전히 남아 있고, 호석(護石, 무덤 외부를 보호하고자 돌로 만든 시설물)이 노출된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어 비화가야인의 장송 의례와 고분 축조 기술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연구소는 "63호분에서 나온 비화가야 지배자 무덤의 축조 기법과 장송 의례, 출토 유물 등은 가야와 신라의 접경 지역에 위치하면서 복잡하고 다양한 문화가 나타나는 비화가야의 성격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연구소는 지난 2014년부터 비화가야 최고 지배층 묘역인 창녕 교동과 송현동고분군(사적 제514호) 내 미정비지역(목마산성의 남서편 구릉부분)을 발굴 조사하고 있다. 2014~2015년엔 5세기 중반경 봉토분 9기, 돌덧널무덤(석곽묘) 15기 등 총 24기 고분을 조사했는데, 벽에 나무기둥을 세워 축조하는 방식, 봉토가 서로 가까이 축조되는 연접 방식 등을 확인했다.

▲ 28일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에서 공개된 63호분 외부 모습. /문화재청
▲ 28일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에서 공개된 63호분 외부 모습. /문화재청

2016년부터는 5세기 중반부터 후반에 걸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고분군 동쪽 상단 부분을 조사하고 있다. 대형 봉토분인 39호분(지름 27.5m)을 중심으로 63호분(봉토 지름 21m)과 소형분(봉토 지름 약 8m)인 38호분, 62호분의 봉토분 4기를 확인했다.

연구소는 "39호분은 빗물 등으로 붕괴를 방지하고자 중심부는 점토로 가장자리는 흙으로 쌓았고, 봉분을 쌓는 단계마다 점토를 깔았는데, 이는 울산 약사리유적 등 고대 제방 유적에서도 잘 나타난다"고 밝혔다. 이어 "남동쪽 호석 가까이로 약 2m 간격마다 큰 항아리를 놓았는데, 한쪽에만 집중적으로 의례용 토기를 놓는 사례는 최근 경주 쪽샘 44호분에서도 확인됐다"고 했다. 또 "약 1.5m 길이 큰 돌을 세우거나(양 장벽과 남단벽), 눕혀서(북단벽) 매장주체부의 네 벽을 만든 구조는 성주 성산동고분군 등 대구·경북지역과 일본 나가노의 키타혼죠(北本城) 고분 등 나가노, 후쿠오카 지역에서도 확인돼 당시 비화가야와 주변국 관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라고 설명했다.

소형분인 62호분에서는 양쪽에 잔이 달린 토기와 6개 잔이 달린 등잔형 토기, 주전자형 토기 등 400여 점 유물이 이미 출토됐다. 연구소는 "이러한 상형 토기는 주로 가야와 신라 지역에서 출토되고 있지만, 창녕에서는 처음 나왔다"고 밝혔다.

▲ 28일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에서 공개된 63호분 외부 모습. /문화재청
▲ 28일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에서 공개된 63호분 외부 모습.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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