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신사의 모습이란 상대와 맞닥뜨려 자기와 생각이 부딪혔을 때 거부하고 싶지만, 결단의 순간에 한쪽 문을 살짝 열어주는 너그러움이 몸에 밴 사람이다.

우리 주변에는 작은 돌멩이 하나에도 파르르 떨며 온 물이 흐려지는 작은 웅덩이 같은 새가슴을 가진 사람들이 뜻밖으로 많다.

똑같은 아픔도 사람에 따라 그 느낌을 표현하는 모습이 제각각이다. 예컨대 창에 찔렸어도 바늘에 찔린 것처럼 아파하지 않고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툴툴 털어버리는 사람이 있고, 바늘에 찔리고서도 창에 찔린 것처럼 호들갑 떨며 아픈 곳을 부풀리는 사람도 있다. 이처럼 같은 곳을 찔리고도 받아들이는 사람 가슴 깊이에 따라 아픔을 표현하는 모습이 다르다.

작은 아픔에도 호들갑을 떨며 자신을 알리고 싶어 하는 사람은 사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 계속 그렇게 살다가는 남들이 그 아픔이 부풀려진 것임을 알게 되면 아무도 그를 신뢰하지 않는다. '튀어나온 서까래가 먼저 썩는다'는 중국의 속담처럼 스스로 썩게 만들고 자신에 대한 신뢰는 날개 없이 추락하고 만다.

우리가 학교에 다닐 적에도 친구와 사소한 일로 싸우다 코피가 터지거나 눈두덩에 시퍼런 멍이 들어도 "그래 별일 없지, 다친 데는 없고" 물어보고 아무 일 없다고 하면 둘을 화해시키고 교탁을 두드려 학생들을 주목하게 한 다음 수업하는 선생이 있다. 반대로 학생끼리 싸움이나 작은 잘못을 두고도 교무실로 데리고 가 무릎 꿇게 하고 부모에게도 알려 그야말로 배보다 배꼽이 큰 것처럼 별것 아닌 일을 무슨 일이 난 것처럼 크게 부풀리는 선생도 있다.

중요한 것은 전자의 선생은 세월이 가도 잊히지 않는데, 후자는 세월이 가며 잊어버린다. 가끔가다 생각이 나도 떠올리기 싫은 기억일 뿐이다.

요즘 한국의 사이비 방송기자들이 후자의 선생 모습을 빼다 박았다. 가짜뉴스야 그렇다 쳐도 인터넷신문과 그와 유사한 방송도 그렇다. 아무것도 아닌 일을 부풀려 큰일로 만들고 정작 큰일이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일, 말해야 할 때 말하지 않고 침묵하는 일 같은 것. 언론의 본래 역할이 뭔가? 신문이든 방송이든 있는 사실 그대로를 부풀리지도 줄이지도 말고, 기자는 사심 없이 육하원칙에 의해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진짜보다 가짜가 판을 치는 세상, 이 땅의 소금 같은 언론, 언론인이 무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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