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 모호한 현대미술 특성 맞춰 성찰적 파괴로 장르 세계 재조명
일제 탓 이중왜곡 한국 현대조각 김종영 추상 기반 재환원 의미도

내년 창원조각비엔날레 주제가 공개됐다. 이번 주제는 '비(非)조각-가볍거나 유연하거나(Non-sculpture-Light or Flexible)'이다.

조각비엔날레 주제가 '비조각'이라니 난해하다. 마침 김성호 2020창원조각비엔날레 총감독이 직접 주제를 설명하는 자리를 가졌다.

총감독이 생각하는 비조각, 그리고 '가볍거나'와 '유연하거나'는 어떤 개념인지, 이를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지 들어봤다.

◇왜 비조각인가 = 경남도립미술관 뮤지엄렉처 마지막 강사로 참여한 김성호 감독은 지난 22일 '지역문화와 비엔날레 현상'을 주제로 강연을 했다. 여기서 2020창원조각비엔날레 주제를 소개했다.

창원조각비엔날레 출발은 조각가 문신 선생의 업적을 기리며 지난 2010년 열린 문신국제조각심포지엄이다. 이후 문신 선생의 예술정신을 확장하고자 이름을 바꾸고 2012년 제1회 창원조각비엔날레를 열었다.

역대 주제는 제1회 '꿈꾸는 섬', 제2회 '달그림자', 제3회 '억조창생', 제4회 '불각의 균형'으로 어느 하나 쉽게 다가오지 않지만 '비조각'은 그중에서도 파격이다.

'동시대 현대미술을 선보이는 비엔날레에서 왜 비조각이 주제여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피할 수 없다.

김 감독은 "현대미술 장르적 특성이 '융복합'이다. 로잘린드 크라우스가 말한 '콤플렉스' 수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퓨전'까지 포함하고 있다. 경계가 와해하는 게 아니라 경계 구분조차 모호해진 예술 유형을 보여준다. 비조각은 자기모순이다. 자기를 성찰하거나 부정하는 방식이니까 (비조각이) 어떤 면에서는 조각의 근본적 본질로 돌아가는 방법론이기도 하다. 또 어떤 면에서는 더 심층적이고 미학적인 옛날 방식을 갖고 와 오늘날 현상을 새롭게 다룰 수 있다"고 설명했다.

김 감독은 '비조각'이 창원이 고향인 근대 조각의 선구자 김종영 선생의 추상과도 맞닿아 있다고 했다.

그는 "김종영 선생, 문신 선생의 고장인 창원은 조각적 베이스를 가지고 있다. 한국 근대적 조각이 실제로 서구적인 조각을 그대로 들여와 우리가 탐색한 게 아니라 일본이라는 왜곡된 과정을 거쳐서 들어왔다. 현대미술 출발 자체가 이중 왜곡됐다. 근현대 조각이 애초 삐걱거리게 출발한 상황이니 그 모습을 성찰해보자고 하는 것이다. 김종영 선생은 추상 조각의 원류다. 추상의 정신은 환원적 성격이 있으니 오늘날 조각 양상을 자기반성을 통해 들여다보자는 것이다. 보는 방식을 성찰하는 비엔날레를 만들고 싶다"고 전했다.

▲ 김성호 2020창원조각비엔날레 총감독이 지난 22일 경남도립미술관 뮤지엄렉처 마지막 강사로 참여해 비엔날레 주제인 '비조각-가볍거나 유연하거나'를 설명했다. /김해수 기자
▲ 김성호 2020창원조각비엔날레 총감독이 지난 22일 경남도립미술관 뮤지엄렉처 마지막 강사로 참여해 비엔날레 주제인 '비조각-가볍거나 유연하거나'를 설명했다. /김해수 기자

◇조각의 자기반성 = 그럼 '비조각'은 무엇인가. 먼저 주개념인 '비조각'은 한마디로 조각의 자기반성, 자기 부정이다. 조각의 처지에서 복잡해진 조각 양상을 되돌아보자는 방법론적 관점이다.

김 감독은 "남을 훈육하고 계도해 변화시키려는 게 아니라 내가 바뀌어보는 것이다. 나는 무지한 존재가 아니었을까. 여기서부터 조각의 새로운 방향성을 생각해보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첫 번째 보조개념인 '가볍거나'는 비조각의 형식을 표현한 것이다. 보편적으로 조각이라고 하면 기념비처럼 덩치가 큰 조각, 딱딱하고 견고한 조각을 떠올린다. 이런 형식의 파괴를 말하고자 한다.

두 번째 보조개념인 '유연하거나'는 비조각의 내용이다. 결과보다 과정 중심, 완성을 향한 미완성을 말한다. 감독의 설명을 들어보자.

김 감독은 두 가지 보조개념에 대해 "광화문에 있는 이순신 동상을 보면 긴 칼을 차고 높은 곳에서 사람들을 내려다본다. 기념비적인 조각의 특징인데 근대 조각은 우리에게 숭상하거나 경배해야 할 대상이었다. '가볍거나'는 이런 관점을 바꿔보자는 개념이다. '유연하거나'는 대나무를 예로 들어보자. 대나무는 휘어지는 속성이 있다. 자신을 변형하면서도 부러지지는 않는다. 이번 비엔날레에서 조각의 베이스를 버리지 않으면서 내용·콘텐츠에 변화를 줄 계획"이라고 밝혔다.

'비조각'이라는 용어는 세 곳에서 영감을 받았다. 먼저 로잘린드 크라우스(Rosalind Krauss) '확장된 장에서의 조각(1979)'이다. 이 논문에서 크라우스 교수는 풍경과 건축이 조각과 만나는 방식으로 비풍경(not-landscape), 비건축(not-arxhitecture)을 도모했다.

비조각은 이를 거꾸로 조각에 적용해 도출한 개념이다. 조각의 자기반성과 자기 성찰 용어인 셈이다.

두 번째는 실험미술의 원조 조각가 이승택 선생이다. 특히 이승택이 쓴 에세이 '내 비조각의 근원(1980)'에서는 영감을 받았다. 서구 근대 조각 유산에 저항하면서 '조각을 향한 비조각적 실험'을 천명했던 개념으로서 비조각을 고스란히 계승했다.

마지막으로 비조각은 넓게는 한국과 동양의 '비물질의 미학'을 드러내는 방법으로, 이번 비엔날레에서 적극적으로 제시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김성호 감독의 말처럼 이번 비엔날레는 '왜 비조각인가'에 대한 물음에 답을 해가는 과정이 될 전망이다. 전문가에게는 새롭고 신선한 시도이겠으나, 일반 대중에게는 심오하기만 한 미학적 관점의 개념을 어떻게 이해시킬 것인지가 과제다. 내년 9월 김 감독이 어떤 프로그램으로 대중들 앞에 설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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