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구 계곡 왼쪽 시전마을 관광객 북적 여름과 달리 고요·화려한 가을 매력적
푸르름 부여잡은 밭작물 철 모르고 핀 장미꽃에서 '자연스러움'고찰하게 돼

큰 사찰 아래 동네에는 으레 관광촌 같은 게 있습니다. 일주문을 지나면 탈 속세의 세계지요. 한여름이면 번뇌를 끊어내는 이 산문 밖이 세속의 욕망으로 시끄럽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묘한 기분이 듭니다. 모순이거든요. 대구 팔공산 갓바위 돌부처나 남해 금산 보리암 해수관음상 아래 엎드린 그 수많은 번뇌에서도 비슷한 걸 느꼈습니다. 생각해보면 이런 모순이 곧 이 세상이기도 하겠지요.

◇한산한 마을길을 따라 = 표충사 앞 식당촌에서 계곡 왼쪽 길로 접어듭니다. 대부분 오른쪽 도로를 따라 차를 타든 걸어서든 표충사로 향합니다. 왼쪽 길은 표충사 아래 시전마을로 나 있습니다. 곳곳에 민박이나 펜션이 들어서 있어 여름 휴가철이면 사람들로 북적입니다.

계곡 건너로 아이들 노는 소리가 왁자합니다. 원래 있던 야영장을 없애고 지난 9월 개장한 '우리 아이 마음 숲 공원'입니다. 엄청나게 큰 놀이터라고 해야겠는데, 보통 놀이터에 있는 놀이기구와는 차원이 다른 규모입니다. 아이들이 정말 좋아하네요. 아이들이 노는 소리는 상쾌한 고음이라 들어도 기분이 좋습니다.

▲ 밀양 표충사 가는 길 식당촌 계곡 왼쪽 시전마을 풍경. /이서후 기자
▲ 밀양 표충사 가는 길 식당촌 계곡 왼쪽 시전마을 풍경. /이서후 기자

식당촌에서 멀어질수록 길이 한산해집니다. 아이들 노는 소리가 아득해지면서 햇살마저 잔잔해지는 것 같습니다. 바람이 불면 나뭇잎 하나하나 흔들리는 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바람에 나뭇잎 몇 개 발치에 툭 떨어집니다. 그러고 보니 산 빛이 완연한 가을이네요. 이제는 거의 말라비틀어진 호박줄기 끝에 아직도 푸른 잎이 남아 안간힘으로 버티고 있습니다. 가을은 이렇게 쓸쓸하면서도 화려해서 좋은 계절입니다.

◇재약산 매바위를 바라보며 = 펜션촌과 옛 동네가 뒤섞인 시전마을로 들어섭니다. 커피와 동동주를 같이 파는 어느 카페 간판이 보입니다. 표충사 계곡에서나 가능할 것 같은 조합이네요. 그 카페에서 영화 〈사랑과 영혼〉 주제가 '언체인드 멜로디'(Unchained Melody)가 흘러나옵니다. 점심이 지난 오후 쓸쓸한 가을 햇살 그리고 계곡 옆으로 퇴색한 플라스틱 의자가 놓인 풍경과 잘 어울리는 곡입니다.

햇살이 모이는 담벼락 아래 의자를 갖다두고 눈을 감고 앉아 있고 싶네요. 길 한가운데 가만히 서서 노래를 듣고 있자니 지나가던 동네 할머니가 신기한 듯 자꾸만 쳐다봅니다. 그러다 끝내는 "뭐 합니꺼?"라고 말을 겁니다. 노래를 듣고 있다니까 거 참 희한한 사람이라는 표정을 지으시네요.

▲ 밀양 표충사 가는 길 시전마을에서 본 광경. 곶감 말리는 풍경 뒤로 재약산 매바위가 보인다. /이서후 기자
▲ 밀양 표충사 가는 길 시전마을에서 본 광경. 곶감 말리는 풍경 뒤로 재약산 매바위가 보인다. /이서후 기자

그래도 마을인지라 감나무 한 그루씩 마당에 품은 집이 많습니다. 까치밥이 매달린 감나무를 따라 마을 깊숙이 들어갑니다. 저기 마을 뒤편으로 보이는 바위가 매바위인 것 같습니다.

표충사가 있는 산이 재약산이죠. 얼음골이 있는 수미봉 쪽으로 올라 사자평까지 가본 적이 있습니다만 표충사 쪽에서 재약산을 올라본 적은 없습니다. 찾아보니 필봉과 매바위를 지나는 산행이 일반적인가 보네요. 매바위는 산 아래에서 보면 매처럼 생겨서 붙은 이름입니다. 얼핏 보기엔 잘 모르겠네요. 실제로 매가 많이 살기도 했답니다. 가까이에서 보면 굉장히 멋질 것 같습니다.

◇시전마을 풍경들 = 매바위 가는 방향으로도 깊숙하게 민박과 펜션, 목장이 들어서 있습니다. 어느 집에서 감을 깎아 가지런히 널고 있습니다. 곶감을 만드는 거죠. 다시 길을 돌아 표충사 쪽으로 방향을 잡습니다.

마을 앞 밭에는 골마다 시금치며 배추가 반듯하게 자라고 있습니다. 쓸쓸한 산 빛을 배경으로 해서인지 푸른 채소가 더 싱그러워 보입니다.

어느 집 입구에 무심하게 놓인 낡은 빗자루를 지나니 어느 집 창문 아래 무청 시래기가 조용히 말라가고 있습니다. 조금 더 걷다 보니 메주가 나란히 매달려 있습니다.

이렇게 한없이 말라가는 풍경 속, 어느 담벼락에 장미 한 송이가 철모르고 피어났습니다.

하지만, 계절이란 개념은 인간이 만든 것이고, 장미로서는 조건이 맞으니 그냥 핀 것이겠지요. 개념이란 게 인류 문명을 여기까지 발전시킨 도구지만, 조건에 맞게 산다는 건 생태계가 지금까지 유지되어 온 까닭입니다.

인류문명이나 생태계나 한 인간에게는 가늠할 수 없는 큰 것들이라 무엇이 더 옳다고 함부로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

▲ 메주가 주렁주렁 달린 모습에 마을이 품은 정겨움이 느껴진다. /이서후 기자
▲ 메주가 주렁주렁 달린 모습에 마을이 품은 정겨움이 느껴진다. /이서후 기자

◇쓸쓸해서 이렇게 좋구나 = 동네가 거의 끝나갈 즈음 다리를 건너야 표충사 입구에 닿을 수 있습니다. 이 다리가 있는 계곡이 여름이면 물놀이를 많이 하는 곳입니다. 다리 초입에 해동상회라는 조그만 가게가 있습니다.

표충사를 몇 번이나 찾았지만, 이 가게만큼 매력적인 곳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작고 낡은 곳입니다. 그래도 아이스크림도 팔고, 하나뿐인 탁자에 앉아 간단하게 술도 한잔할 수 있어 한여름이면 제법 장사가 되는 곳이기도 하죠.

예전에 이 마을에 지인이 살아서 며칠 묵은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밤 산책을 마치고 표충사 입구에서 다리를 건너 시전마을로 들어오다가 불 켜진 이 가게를 봤습니다.

깊은 어둠 속 고요한 불빛으로 섬처럼 서 있던 그 가게가 속세에서 방황하는 영혼들을 위한 등대처럼 보였습니다. 그때 아이스크림을 하나 꺼내 들고 가게 안으로 계산을 하러 들어갔습니다. 밤이 늦어 누워 있던 주인이 문을 열고 덤덤히 손님을 맞았는데, 그 덤덤한 태도가 뭔가 엄청난 안정감을 주더군요. 그 후로는 가게 앞을 지날 때마다 그날의 기분이 떠오릅니다.

다리 위에서 보니 한여름 왁자했을 표충사 계곡이 더없이 조용합니다. 거기에 낙엽까지 지고 있으니 더욱 쓸쓸합니다. 그런데 쓸쓸함만 남은 모습이 이렇게 좋을 수도 있군요. 가을 햇살에 취했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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