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인 옛 애인의 편지에 답하러 떠나는 과정 그려
보편적 사랑의 관점에서 퀴어 소재 세련되게 연출
'윤희 그 자체'로 보이는 김희애 배우 연기 인상적

'나는 쇄골이 반듯한 사람이 좋습니다/ 그렇군요/ 좋아합니다/ 쇄골을요?/ 은교씨를요/ 나는 쇄골이 하나도 반듯하지 않은데요/ 반듯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좋은 거지요.' - 황정은 <백의 그림자> 중.

사랑을 할 때 겉모습보다 내면이 중요한 사람이라면? 취향과 가치, 대화가 얼마나 통하느냐를 생각하지, 눈 크기나 키, 나이 같은 껍데기 따위 안중에 없다면, 성별 또한 껍데기 범주에 속한다면?

같은 성별을 가진 사람에게 끌린다는 게 왜 이상한 일일까. 세상을 살아가면서 마음 잘 맞는 딱 한 사람 만나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말이다.

성별이 같다는 건, 마치 '쇄골이 반듯하지 않다'거나 '목소리가 독특하다'와 같은 문제다. '네가 그런 형태이지만 그래도 네가 좋아'라고 하는 게 사랑이지 않은가!

지금에야 이런 생각이 가능하지만 20년 전에는 공식이고 법이었다. '사랑은 이성끼리 하는 것.' 그런 시절이라 한들 껍데기가 중요하지 않은 사람에게서 성별을 뛰어넘는 사랑을 막지는 못했을 게다.

짐작했겠지만 <윤희에게>는 퀴어(queer·성소수자) 영화다. 모녀가 등장하는데 딸이 아니라 어머니 쪽이다. 20년 전 연인 '쥰'(나카무라 유코)에게 이별을 고한 윤희(김희애)는 오빠의 소개로 만난 남편과 이혼하고 딸과 살고 있다.

쥰이 기침하듯 썼지만 차마 보내지 않은 편지가 어느 날 윤희 딸 새봄(김소혜) 손에 들어간다. 영화는 사랑했던 두 여인이 20년 만에 만나는 여정을 그렸다.

▲ 윤희 역을 맡은 배우 김희애는 '윤희가 곧 김희애 그 자체'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깊이 있는 연기로 영화가 관객에게 자연스럽게 와닿게 만들었다. /스틸컷
▲ 윤희 역을 맡은 배우 김희애는 '윤희가 곧 김희애 그 자체'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깊이 있는 연기로 영화가 관객에게 자연스럽게 와닿게 만들었다. /스틸컷
▲ 윤희 역을 맡은 배우 김희애는 '윤희가 곧 김희애 그 자체'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깊이 있는 연기로 영화가 관객에게 자연스럽게 와닿게 만들었다. /스틸컷
▲ 윤희 역을 맡은 배우 김희애는 '윤희가 곧 김희애 그 자체'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깊이 있는 연기로 영화가 관객에게 자연스럽게 와닿게 만들었다. /스틸컷

퀴어 영화이지만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윤희의 답장을 듣기 전까지는 확신이 들지 않는다.

감독은 민감한 소재를 자극적이지 않도록 은근하고 세련되게 요리했다. 영화의 주 배경은 일본 오타루 눈 덮인 마을이다. 영화 초반과 중반, 후반에 '눈이 언제 그치려나'라는 대사가 나온다.

윤희와 쥰의 마음 역시 한겨울 하염없이 내리는 눈과 같지 않았을까.

첫사랑과 눈, 편지라는 소재는 영화 <러브레터>를 떠올리게 한다. 러브레터와 달리 주인공 두 사람의 성별이 같지만 서로 오래도록 그리며 살아온 마음만큼은 다르지 않다.

영화는 오래전 이루지 못한 사랑의 서사인 동시에 윤희라는 인물이 20년 전 상처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영화 초반 왜 사느냐는 새봄의 질문에 윤희는 자식 때문에 산다고 답한다. 새봄이 아빠 인호(유재명)에게 이혼한 이유를 묻자 대답은 '네 엄마는 나를 외롭게 하는 사람이었어'다.

영화에는 윤희와 쥰의 과거 회상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 다만 몇몇 대사에서 두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았을지 추측할 수 있다.

윤희는 부모님께 쥰을 사랑한다고 말했다가 억지로 정신병원에 다녀야 했다. 그땐 그럴 수밖에 없던 일이라 생각하면서도 윤희는 남은 생을 벌을 받는 심정으로 살았다고 했다.

쥰 역시 자신에게 다가오려는 여성에게 충고한다. 자신이 어머니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숨기고 살아온 것처럼 당신도 뭔가 숨기는 게 있다면 절대 들키지 말라고. 직접적인 언급은 없었지만 '유리할 게 없다'는 말로 윤희와 만남 이후 쥰이 걸어온 삶을 유추할 수 있다.

두 사람은 가슴속 저 바닥에서 타오르는 애틋함을 외면한 채 자신을 억누르며 나무 장작처럼 살았다. 차별의 시대를 견디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리라.

하지만 쥰의 편지를 받고 윤희의 삶은 달라진다. 윤희는 죄인처럼 살아온 지 20년 만에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잘못한 게 없다는 말과 함께. 비로소 자유를 얻은 것이다. 그러고는 마지막 말을 남긴다. '추신 나도 네 꿈을 꿔.' 과연 '오겡키데스카'를 잇는 명대사다.

영화가 자연스럽게 와 닿는 데는 배우 김희애 연기가 큰 역할을 했다. 민낯에 인상을 쓰고 담배를 피우는 모습도, 새봄의 카메라를 보고 활짝 웃어 보이는 모습도 '윤희' 그 자체다.

▲ 윤희의 딸 새봄(김소혜 분·오른쪽)은 남자친구 경수(성유빈 분)와 함께 영화에 풋풋한 싱그러움을 더한다. /스틸컷
▲ 윤희의 딸 새봄(김소혜 분·오른쪽)은 남자친구 경수(성유빈 분)와 함께 영화에 풋풋한 싱그러움을 더한다. /스틸컷
▲ 윤희의 딸 새봄(김소혜 분·오른쪽)은 남자친구 경수(성유빈 분)와 함께 영화에 풋풋한 싱그러움을 더한다.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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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칫 진지한 멜로가 될 뻔한 영화에 생기를 불어넣은 건 새봄이다. 윤희와 쥰의 오작교 역할을 한 새봄과 남자친구 경수(성유빈)의 풋풋한 케미가 영화를 한층 싱그럽게 한다.

영화 곳곳에는 인물들의 심경 변화와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 방향을 상징하는 장치들이 숨어있다. 장치들을 따라가 보는 것도 영화를 감상하는 또 다른 재미겠다.

누구에게 말하지 못하지만 가끔 꺼내 보면서 뜨거웠던 시절을 추억할 수 있는 사람, 그리움을 참을 수 없어 부치지 못할 편지를 쓰거나 꿈에서 만나는 사람이 있다면 퀴어라는 소재와 별개로 공감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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