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듦을 불편하게만 여기는 세상이라도
깨닫고 실천하며 매일 새 출발 할 수밖에

"바닥에서 일어날 때 한 번에 못 일어나겠어. 꼭 끙끙거리고 바닥 짚고 힘을 써야 돼."

"금방 본 전화번호가 안 외워져."

열린 공간 카페에서 들은 대화다. '그래 그래' 하며 대화에 끼어들 뻔했다.

74살의 현직 통기타 가수 서유석의 노래 중에 '너 늙어봤냐 난 젊어봤단다'라는 곡이 있다. 질문부터 던진다.

너 늙어봤냐 나는 젊어 봤단다. / 이제부터 이 순간부터 나는 새 출발이다. / 삼십 년을 일하다가 직장에서 튕겨 나와 길거리로 내몰렸다. / 사람들은 나를 보고 백수라 부르지 / 월요일에 등산 가고 화요일에 기원 가고 수요일에 당구장에서 / 주말엔 결혼식장 밤에는 상갓집 / 너 늙어봤냐 나는 젊어봤단다./ 이제부터 이 순간부터 나는 새 출발이다.

노인에 대한 사회의 불편한 시선에 저항한다. '너 늙어봤냐'고. 삼십 년 직장에서 은퇴한 후에도 여전히 바빠 보이지만 백수라 불린다. 다음 가사를 보자.

세상 나이 구십 살에 돋보기도 안 쓰고 보청기도 안 낀다./ 틀니도 하나 없이 생고기를 씹는다./ 누가 내게 지팡이를 손에 쥐게 해서 늙은이 노릇 하게 했는가?/ 세상은 삼십 년간 나를 속였다.

세상 나이로 90살이지만 돋보기도 안 쓰고 이도 튼튼하며 귀도 잘 들리는데 왜 노인이라고 몰아붙였냐고 따진다. 늙지도 않은 자신을 노인이라며 세상이 자신을 속였다고 한탄한다.

서유석의 또 다른 노래가 떠오른다. '가는 세월'이다. '구름처럼 가는 세월을 누구도 막을 수 없고 잡을 수 없지만 마음만은 영원하리라'던 그 가사에 비하면, 이 노래, '너 늙어봤냐 난 젊어봤단다'는 놀랍도록 진취적이고 적극적이다. 가수 당사자의 세상 나이가 늘어나니, 늙음에 대한 애타는 마음이 절실해서일까.

코언 형제의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화제였던 적이 있다. 영화 속 괴물 같은 살인자가 말한다. "믿었던 룰 덕에 이 꼴이 됐다면 그 룰은 어디다 쓰지?"

전율이 느껴졌다. 우리 사회의 룰, 법이나 규칙은 우리에게 얼마나 안전한가. 괴물이 되지 않을 만큼 안전하기는 한가. 영화에는 비루한 법이지만 지키려는 보안관이 나온다. 선한(?) 인물이다. 하지만 곧 은퇴하는 노인이다. 노인이 되어 은퇴한 그는 남은 30년을 어떻게 살 수 있을까.

아내도 같이 놀아주지 않는 그의 미래가 안전하기나 했으면 좋으련만. 노인이 살기 힘든 사회는 다른 사람도 살기 힘들다. 여자와 어린이, 성 소수자나 이민자…. 미래에는 우리 사회 다수가 안전하지 않을 것 같다.

나이를 짐작 못 하게 사는 노인도 많다. 흔히 '어모털족'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외모나 근력이나 가치관이나 해내는 일이나 모두 젊은 사람 못지않지만, 극소수일 뿐이다.

그렇다면 나이 들면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늦은 나이일지라도 교양 쌓기와 깨달음에 대한 실천이 해답이다. 옳다고 여기는 일에 대한 점검과 숙고, 또한 실천을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미래 예측은 젊고 똑똑한 사람도 힘들 수 있다. 경험의 힘으로 가능한 예측은 젊은이들에게 알리고 모두를 위한 새로운 가능성에 주목해야 한다. 실천에서는 젊은 날의 속도는 무시하는 게 낫다. 이미 그때의 자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받아들이고 인정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젊음이 알 수 없고 늙음이 할 수 없었던' 삶은 기억 속에 남겨두고, 그저 뭐라도 깨달아지는 순간마다 노래처럼 '새 출발 할 수'밖에 없다. 어떤 결과든 기꺼이 축복으로 받아들이면서 말이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