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이하게 내륙에 어촌 형성 낚시꾼 생업 삼는 이 많아
함습지 많은 탓 침수 잦아도 다른 곳보다 가뭄 덜해

함안은 습지의 고장이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낙동강과 남강이 함안을 감싸고 흐르기 때문이다. 오횡묵이 1889년 4월 22일 읽은 <군지>에도 나온다. '형승(形勝)' 조항에서 가장 먼저 "낙동강과 풍탄(楓灘)이 북쪽에 가로 놓여 있다"고 했다. 풍탄은 함안군 법수면과 의령군 정곡면 사이 물살(여울)이지만 여기서는 함안에 걸쳐 흐르는 남강 전체를 이른다.

'형승' 조항은 이어 "여항산과 파산이 남쪽을 누르고 있다"고 적었다. 얼핏 보면 산은 습지와 상관이 없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높든 낮든 산이 있으면 골짜기가 있고 또 골짜기를 타고 흐르는 물줄기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런 물줄기가 평지를 만나면 이루는 것이 바로 습지다. 함안읍성을 중심으로 볼 때 여러 물줄기들은 대체로 여항산이나 파산에서 비롯되었다.

그래서 <군지>는 '형승' 조항 마지막에서 함안 전체를 두고 "산비탈과 언덕이 서로 닿아 있고 들판과 진펄이 넓게 펼쳐져 있다(岡阜相屬 原습廣衍)"고 적었다.(1587년에 만들어진 <함주지>에도 똑같은 표현이 나오는데 그렇다면 <군지>가 <함주지>를 베낀 셈이다.)

▲ 함안천에 남아 있는 옛 제방의 모습. 주민 한 분은 이 마을숲을 '봉성둘숲'이라고 했다.  /김훤주 기자
▲ 함안천에 남아 있는 옛 제방의 모습. 주민 한 분은 이 마을숲을 '봉성둘숲'이라고 했다. /김훤주 기자

◇오횡묵이 그린 습지 경관

오횡묵은 습지가 많은 지역이 아니면 보기 어려운 정경을 1889년 4월 21일 부임길에서부터 남기고 있다. 창녕 상포(上浦=웃개=지금 남지)에서 배를 타고 맞은편 칠원 상포(上浦=지금 칠서면 계내리 373 칠서취수장 동쪽 일대)에 내린 오횡묵은 8리를 가서 함안 땅을 처음 밟았다.(당시 칠원은 함안과 다른 별도 행정단위였다.)

'부촌뒷고개(富村後嶺)'였는데 이를 넘어 지금 대산면 부목리 일대에 이르러 "2리에 부촌" "1리에 남포(藍浦)"라 적었다. 여기서 색다른 정경이 나타났는데 말하자면 바다나 강가가 아닌 내륙에 형성된 어촌이었다. "붕어·잉어가 많이 나서 낚시꾼들이 날마다 모여드는데 생업으로 삼는 사람이 많다."

1리를 더 간 목지(木池)에서는 "마을 앞에 갯도랑(浦溝)이 있는데 얕은 데는 치마를 걷고 깊은 데는 배를 탄다"고 했다. 8리를 더 간 평림(平林)에서는 "여기까지 10리는 평평하고 질펀하고 나지막하고 파였다(平衍오陷)"면서 전체 들판의 형세를 돌아보았다.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고

아직 근대 토목기술이 들어오기 전이었으니 "남강이 불어 넘칠 때마다 물난리(澇)를 겪"고 "지난날에는 비옥한 농토(沃田)였으나 지금은 한갓 갈대밭(蘆場)으로 바뀐" 지대였다. 갈대는 땔감이나 지붕으로 쓰였고 조정은 여기에까지 조세를 매겼다. "일곱 면(面) 노초장(蘆草場=갈대밭) 세금이 매년 700냥 남짓"(1889. 5. 6.)이었던 것이다.

오횡묵은 이런 악조건을 함안 백성들의 부담을 더는 방편으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1889년 7월 4일 대구 감영을 찾아 순찰사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본군(本郡)은 물가(浦)에 열두 면이 있고 산골(峽)에 여섯 면이 있습니다. 물가 면은 남강과 낙동강 두 강 언저리에 있어서 비가 오면 범람하고 가뭄이 들면 말라버리니 가뭄과 큰물이 모두 재해가 됩니다. 산골 면은 땅이 척박하고 자갈밭이 많습니다." 형편이 이처럼 딱한데도 조세는 과중하니 줄여주십사 사정하여 결국 허락을 받아내는 오횡묵이었다.

당시 지명으로 따져보았더니 산골에 있는 면은 산익·병곡·상리·산내·산외·비곡면이었다. 또 물가에 있는 면은 내대산·안인·외대산·백사·마륜·대산·우곡·남산·안도·대곡·죽산·산족면이었다.

습지가 많다는 이런 특징이 이롭게 작용한 적도 있었다. 두 달가량 가뭄이 이어지는 바람에 하루걸러 한 번씩 모두 열다섯 차례 기우제를 지내야 했던 1892년 윤6월 23일이었는데 오십보백보지만 다른 지역보다 가뭄이 덜했다는 얘기다.

"농사 형편은 재앙을 알리는 수준이지만 사방 여러 읍들과 견주면 그래도 낫다고 하니 걱정만 하고 한숨만 쉴 것은 아니다." 한시로도 읊었다. '지금은 땅바닥(地底)이 축축한 것이 오히려 다행이니/ 저쪽 지경과 비교하면 이쪽이 낫구나.'

▲ <함안총쇄록>에 실려 있는 함안군 지도. 지금 지도와 달리 북쪽이 아래이고 남쪽이 위에 있다. 아래 물줄기는 남강이고 그리로 흘러드는 왼쪽은 함안천, 오른쪽은 석교천이다.<br /><br />  /한국학중앙연구원
▲ <함안총쇄록>에 실려 있는 함안군 지도. 지금 지도와 달리 북쪽이 아래이고 남쪽이 위에 있다. 아래 물줄기는 남강이고 그리로 흘러드는 왼쪽은 함안천, 오른쪽은 석교천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마을 쪽에만 있었던 옛날 제방

지금 제방을 보면 모두 하천 양쪽에 들어서 있다. 130년 전 또는 그 이전에도 지금과 같았을까?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근거는 천변에 남아 있는 마을숲들이다. 옛날 사람들은 하천 양쪽에 마을숲을 조성하지 않았다. 마을이 있는 한쪽에만 제방을 쌓고 그 위에 마을숲을 만들었던 것이다.

농지도 제방 바깥쪽 마을이 있는 쪽에 주로 있었다. 제방에도 농지가 있었지만 걸핏하면 물에 잠기는 처지였고 나머지는 물이 흐르는 시내와 물이 고여 있는 웅덩이 또는 갈대·억새와 버들개지 같은 잡목이 우거진 황무지가 뒤섞여 있었다.

이런 사정은 1890년 4월 25일 오횡묵이 받아든 제언사(堤堰司) 공문에서도 확인된다. 수리(水利) 행정을 총괄하는 중앙부서가 제언사였는데 지금 한국농어촌공사와 비슷하다. 하지만 지역 조직은 달리 갖추지 않아 군현(郡縣)을 통해 행정을 집행했다.

"토호(土豪)와 교활한 관리(猾吏)들이 제멋대로 제언 안에서 경작하여 봄에 물을 모아야 할 때는 '물에 잠긴다'면서 터서 새나가게 하고 여름에 물을 대야 할 때는 '가뭄을 입었다'며 가로막아 통하지 않게 한다. 심지어 경사(京司=중앙 부서) 소속이라는 핑계로 제방을 헐고 논을 만드니 거의 막을 수 없다." 제언사는 이런 폐단을 금단하라는 취지로 공문을 보냈다.

◇함안천에 남아 있는 옛날 제방

함안향교 앞 신교마을이 들판과 마주치는 자리에 옛날 제방이 하나 남아 있다. 마을 남서쪽 야산 자락에서 흘러내리는 계곡물이 함안천으로 합류하는 지점이다. 함안읍성 남문에서 500m정도 거리로 함안면 봉성리인데 이는 오횡묵 당시 상리면에 포함되어 있었다. 2014년까지만 해도 맞은편이 너른 들판이었으나 지금은 국립원예특작과학원 시설원예연구소가 들어서 있다.

몸통은 바닥과 함께 콘크리트가 덮어써서 옛 모습을 잃었다. 하지만 제방 위팽나무·느티나무·말채나무 등 오래된 노거수 스물일곱 그루는 옛 모습 그대로다. 상류에서 봉성교 언저리까지 400m가량 늘어서 있는데 큰 것은 나이가 500살은 넘어 보이고 굵기도 서너 아름은 되었다. 주민 한 분은 "봉성둘숲"이라 하고, 다른 한 분은 "이름은 없고 그냥 숲"이라 했다.

망가지지 않은 옛 모습 그대로 제방도 확인되었다. 지금 콘크리트 제방은 남서쪽으로 줄곧 이어지는데 마을숲이 끝나는 지점에서 도도록한 둔덕이 하나 서쪽으로 뻗어 산기슭으로 이어진다.

오른쪽과 왼쪽이 모두 농지여서 두렁으로 간주하면 쓸데없이 높고 크다. 길이는 60m 정도인데 겉으로 보기에는 보잘것없지만 오랜 세월 노동으로 유지해왔던 제방임이 분명하다.

마을숲과 제방은 1954년 찍은 항공사진에도 나타난다. 지금 남아 있는 것뿐만 아니라 사라진 것도 확인된다. 봉성교 하류의 경우 지금은 한 그루뿐이지만 그때는 적어도 네 그루 이상 더 있었다. 지금은 국도 79호선이 덮어쓴 부분도 그때는 숲은 없었어도 길게 제방이 이어지고 있었다.

◇함안읍성을 있게 만든 가칭 '금천방죽'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오횡묵을 따라 <군지>의 '제언(堤堰)' 조항을 읽어보면 지금 함안면 봉성리가 포함되는 상리에는 '성현제(筬峴堤)'와 '금천방죽(琴川防築)' 둘이 있다고 나온다.

성(筬)은 바디·베틀을 뜻하고 지명 성현(筬峴)은 바디재·베틀재로 남은 경우가 많은데 현재 함안에서 확인된 바는 없다. 그렇다면 금천방죽일 가능성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 <함주지>에서 '산천' 조항을 보면 함안천을 대천(大川)이라 하고 그 대천이 상리부터 함안읍성 동쪽을 지나 검암마을까지 이르는 구간을 금천(琴川)이라 했다. 이런 정도면 조심스러우나마 가칭 금천방죽이라 해 볼 수 있겠다.

가칭 금천방죽은 함안읍성과 함안군을 존재할 수 있도록 만든 일등공신이다. 이 제방이 없었다면 함안읍성은 큰물이 질 때마다 물에 잠겼고 그랬다면 아예 읍성은 들어서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면 당연히 지금과 같은 역사 속 함안군 또한 성립될 수 없었다.

앞서 9회에서 다룬 읍성 안 자이선은 오래전부터 큰물이 쓸고 내려갔음을 보여주는 물증이다. 이찬우 생태학 박사는 "불어난 하천물이 깎아내면서 생긴 하식애가 자이선 바위벼랑이고 이런 범람과 침식을 막아주는 것이 바로 이 제방이었다"고 말했다.

▲ 신교마을 쪽에서 본 제방과 '봉성둘숲'. /김훤주 기자
▲ 신교마을 쪽에서 본 제방과 '봉성둘숲'. /김훤주 기자

◇혹시 오횡묵이 고생했던 그 제방?

이런 중요한 제방이라면 어쩌면 <함안총쇄록>에도 기록이 남아 있을 수 있겠다 싶었지만 특정하여 명시되어 있지는 않았다. 다만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은 없지 않았는데 1890년 4월 6일의 일이었다.

오횡묵은 고을 수령으로서 사람들을 모아 제방을 고치고 쌓았다. 몸소 나가서 지휘·감독하면서 술과 안주와 담배도 베풀었다. 필요하다면 채찍도 서슴없이 휘둘렀으니 한편으로는 달래고 한편으로는 어르는 모양새였다.

"상리(上里) 방축(防築)하는 데에 나가 모인 면정(面丁)들에게 돌을 지게도 하고 쌓게도 하도록 시내를 따라 오르내리며 감독하였다. 행여 게으른 모양새가 있으면 반드시 적발하고 채찍질하여 잠시도 손을 놓지 못하게 하였다.

점심때 각자 갖고 온 들밥을 먹게 하고 조금 있다가 일을 다시 시작하였다. 쉴 때 술 다섯 동이와 북어 안주를 먹였더니 서로 다투어 힘을 내어 해지기 전에 완전히 끝났다. 늙은 농부와 늙은 아전들이 모두 말하였다. '여기 이 일은 해마다 하는데 빠르고도 완전하게 한 것은 모두 몸소 감독하신 결과입니다.'" 한시도 지었다. '자루를 들어 모래 위에 돌을 올리고/ 많은 사람의 힘으로 물속에 언덕을 만드네.'

더위로 크게 고생하기도 했다. "시냇가 조금 떨어진 데에 나무그늘이 정말 좋았다. 잠깐 더위를 식히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지만 그 잠깐이 반드시 일을 크게 방해할 것 같았다. 그래서 진시(辰時)부터 신시(申時)까지 제방 위 한데에 앉아 있었는데 땀과 열을 이길 수 없었다." 원님이 이런 정도였으니 실제 몸을 부린 백성들은 정말 죽을 지경이었겠다.

<함안총쇄록>에 담겨 있는 이 기록이 어쩌면 지금 남아 있는 옛날 제방 일대와 비슷한 것 같다. 오횡묵이 '시냇가 조금 떨어진 데에 나무그늘'이라 적은 자리가 '봉성둘숲'일 수 있는 것이다. 아침 7시부터 저녁 5시까지 열 시간을 땡볕에 앉아 있었던 '제방 위 한데' 또한 지금 국도 79호선이 덮어쓴 마을숲 하류 제방 어느 한 지점일 가능성이 없지 않다.

◇술과 북어와 담배를 풀며 보(湺) 공사도

이러거나 저러거나 <함안총쇄록>에는 이 밖에 비슷한 기록이 두 차례 더 나온다. 이는 제방이 아니라 보(洑)를 쌓는 공사였다. 보는 제방과 달리 하천을 가로막아 물을 가두는 시설이다.

"상평(上坪) 큰 보를 수축하는 데 갔다. 지난해 큰물에 무너지고 터지고 메워지고 막혔다. 일이 매우 크고 많아서 달려온 일꾼이 105명이었다. 삽질을 하고 삼태기로 나르는데 도랑에 가득하여 좋았다. 모두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니 열심히 하라고 다그치기도 전에 이미 뜻을 내어 힘껏 일하였다.

가게에서 술 네 동이와 북어 2부(部)와 담배 두 움큼을 외상으로 사와서 나누어 주었다. 많지 않은 물건으로 여러 사람을 기쁘게 하고 많은 사람들의 힘을 가지런히 정리하였으니 격려하고 권장하는 데 이런 것이 없을 수 없다."(1892. 2. 12.)

"오후에 상리(上里) 시내를 막아 큰 보를 내는 공사를 하는 곳에 나갔다. 막걸리 다섯 동이와 담배 다섯 움큼과 북어 두 쾌(쾌=20마리)를 상으로 주었다. 수백 일꾼들이 즐겁고 기뻐하며 '나와서 일을 해도 고된 줄 모르겠다'고 하였다."(1892. 4.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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