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대산 냇물 풍요 빚어낸 감계 신도시 내 전통촌락
낡은 흙집에 닭 울음소리 감나무밭 옆 마른 참깻단
수수한 농촌마을 모습 뒤 고층 아파트숲 묘한 대비

"아파트촌 사이에 옛 동네가 남아 있어요."

지인의 한마디로 꼭 한번 가보고 싶어졌습니다. 창원시 의창구 북면 감계·무동지구 이야기입니다. 아파트가 숲을 이룬, 창원에서도 대표적인 신흥 주거지역이죠. 둘 중에 규모가 큰 감계지구로 향했습니다. 입주 초기에 한두 번 들른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제법 삭막한 느낌이었지요. 그런데 이제는 영락없이 도심 분위기가 납니다. 거대한 아파트 숲 사이에 진짜로 옛날 마을이 그대로 남아있더군요. 내감마을이란 곳입니다.

▲ 창원시 의창구 북면 감계지구 안에 있는 내감마을 정자나무. 뒤로 아파트 숲이 우뚝하다. /이서후 기자
▲ 창원시 의창구 북면 감계지구 안에 있는 내감마을 정자나무. 뒤로 아파트 숲이 우뚝하다. /이서후 기자

◇마을 안은 정겨운 풍경이 그대로 = 감계지구가 있는 감계리는 원래 내감마을과 중방마을 사람들이 농사를 짓고 살았습니다.

산등성이에서는 단감 과수원을 하고, 마을 앞으로 너른 감계 들판에서는 쌀 농사를 지었습니다. 이 들판을 밀고 아파트가 들어선 거죠. 근처에 외감마을이 또 있습니다. 여기는 외감리에 속합니다. 하지만, 외감, 중방, 내감 이렇게 연결되어 있었다는 건 이름만 보고도 알겠네요.

내감마을과 중방마을은 지금도 감계지구 안에서 원래 동네 형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물론 감계지구 인구가 늘면서 식당이며 카페 같은 게 슬금슬금 마을 외곽부터 밀고 들어오고 있긴 합니다. 그래도 마을로 쑥 들어가면 영락없는 시골 풍경입니다.

마을 정자나무가 지금도 긴 가지를 드리우며 한때 마을 입구였을 좁은 길 어귀를 지키고 있습니다. 어디선가 닭 우는 소리가 길게 들립니다.

여기저기 텃밭에는 싱그럽게 늦가을 배추가 자라고 있습니다. 드문드문 남은 농가 흙벽에 농기구가 걸려 있습니다. 여지없이 낡아서 운치가 더한 시골 대문 안으로 마당이 보입니다. 할머니 한 분이 탁탁 콩을 털고 있습니다.

마을 곳곳에 참깨 깻단이 바짝 마른 채로 세워져 있습니다. 마당마다 한 그루씩은 있는 늙은 감나무에 주황색 감이 선명하게 달렸습니다. 까치밥으로 일부러 남긴 것 같진 않지만 덕분에 근처 산에서 날아든 새들에게 좋은 먹이가 되고 있습니다. 이런 풍경 너머로 거대한 아파트들이 배경처럼 솟아 있습니다. 그야말로 묘한 풍경입니다.

▲ 북면 감계지구 내 내감마을에는 아직 흙벽으로 된 옛집과 까치밥을 매단 늙은 감나무가 남아 있다. /이서후 기자
▲ 북면 감계지구 내 내감마을에는 아직 흙벽으로 된 옛집과 까치밥을 매단 늙은 감나무가 남아 있다. /이서후 기자

◇작대산이 만든 충적평야 = 마을 한가운데로 흐르는 하천은 다행히 아직 맑은 것 같습니다. 저기 작대산에서 시작한 물줄기겠습니다. 작대산은 높이가 647.2m인데, 무언가 영험한 느낌이 있습니다. 옛날, 이 세상이 온통 물로 덮였을 때 산봉우리가 꼭 작대기만큼 남았다고 지어진 이름이랍니다. 이런 식으로 홍수 이야기에서 생긴 산 이름들이 꽤 많지요.

작대산에서 시작한 하천은 내감마을과 중방마을 앞에 넓은 충적평야를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감계 들판은 일제강점기에 낙동강 배후습지를 농지로 개간하기 전에 북면에서 가장 넓은 평야였다고 합니다. 수리조합을 만들어 개간 사업을 진행했기에 마을 어르신들은 개간하는 걸 '수리한다'고 표현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동네 어르신 두 분께 들었습니다. 한 분은 내감마을에 사시는 분이고, 또 한 분은 중방마을에 사시는 분입니다. 흙벽으로 된 옛집을 그대로 식당으로 고친 중국음식점 앞에 햇살을 받으며 앉아 계셨습니다. 아파트촌을 등지고 북창원 IC 방향으로 탁 트인 풍경을 보고 계셨지요. 그래도 눈앞으로 동네 안으로 바짝 들어온 피자집이며 고깃집 간판이 보이긴 합니다.

▲ 북면 감계지구 내 내감마을에는 아직 흙벽으로 된 옛집이 남아있다. /이서후 기자
▲ 북면 감계지구 내 내감마을에는 아직 흙벽으로 된 옛집이 남아있다. /이서후 기자

◇먼 산 보며 옛 영광을 회상하다 = "옛날에도 북면 감계라 카면 인근에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지."

"북면서 제일 싸움쟁이가 많이 나서 그렇다! (옆 어르신을 가리키며) 이 양반도 젊을 때 한가락했지."

"아이고, 뭐 이름이 나지는 않아도 (싸움에서) 넘한테 지지는 안 했지. 운동도 잘해서 축구대회 같은 거 하면 북면 대표 중에 내감마을이 안 들어가면 시합이 안 된다 캤는데 뭐."

반듯한 몸가짐을 보아하니 정말 젊을 때 제법 날쌘 분이셨을 것 같습니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감계가 북면 부자동네였던 때도 있었다고 합니다.

"일제시대에 온천, 수리 생기기 전에는 이 마을에 북면 1등 부자가 다 살았다 캤다. 여기 감계 벌판이 원래 넓기로 소문난 벌판이오."

풍족한 환경에서 똑똑한 인물도 많이 났나 봅니다. 특히 중방마을이 그랬답니다. 바로 그 때문에 현대사의 아픔을 제대로 겪기도 했고요.

"중방은 옛날에 조가가 많이 살았어. 한 60호나 됐는가베. 인자 한두 집밖에 안되지. 조가 집안에 창원 향교장까지 한 분도, 그 아들들도 굉장히 똑똑했는데, 그 동네 먹물 좀 든 사람은 다 사상물(사회주의 사상을 말함)이 들어서 6·25 나고 보도연맹인가 해서 다 죽었거든. 그런 사람들 지금 있었으면 국회의원 하고도 남지."

이야기를 하고 어르신들은 다시 먼 산을 바라보십니다. 그러고 보니 이제 감계에서 쌀 농사는 짓지 않겠지요. 그래도 동네 곳곳에 텃밭이 좋다고 하니 대부분 남의 땅이라고 하네요. 택지 분양으로 땅 주인이 따로 있지만, 아직 건물을 짓지 않은 빈터에서 간단하게 밭농사를 짓는다는 뜻이겠습니다.

▲ 북면 감계지구 내 내감마을 시골길을 지나 아파트촌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 모습. /이서후 기자
▲ 북면 감계지구 내 내감마을 시골길을 지나 아파트촌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 모습. /이서후 기자

어르신들은 밭을 맨다는 말을 '쪼산다'고 표현합니다.

"나도 요 앞에서 쪼사가 해먹는데 한날 땅 주인이 나를 찾아오가꼬, 농사 지 묵는 거는 얼마든지 지무이소, 대신 내가 집을 짓는다 카면 무조건 비끼주야 됩니더, 카더라고. 지가 집을 안 지으면 내는 뭐 죽을 때꺼정 할 수 있는기라."

어르신들께 인사하고 돌아 나오는데, 몇 무리 아이들이 마을 안길을 도란도란 걸어옵니다. 바로 옆 감계초, 감계중 아이들이겠습니다. 정겨운 시골길을 걸어 집으로 가는 아파트촌 아이들이라니. 여느 도시 아이들과는 다른 감수성으로 자라날 것만 같습니다. 그러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파트 가득한 이곳 감계에도 깊숙하게 가을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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