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 82년생 김지영 (감독 김도영)
세대 아우르는 여성 삶 그려
원작 소설만큼 이슈 한복판

*영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보낸 엄마들. 영호네 집에 모여 차를 마신다.

수학 문제를 풀면 마음이 안정된다는 영호 엄마. 서울대 공대 출신이다.

"왜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나 몰라"라는 말에 누군가 "영호 구구단 가르치려고"라고 한다.

엄마들 '조크'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박장대소를 한다.

영호 엄마가 보람 엄마에게 "자기 전공이 뭐라고 그랬지?"라고 묻는다.

"나는 우리 보람이 책 읽어주려고 연기 전공했습니다.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지? 백설공주?"

실감 나는 여왕 연기에 관객들도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웃음 끝에 남은 쓴맛이 너무 진해 속이 쓰렸다.

내가 복직을 하지 못했다면 나도 저 자리에서 끼어 말하겠지. "나는 신문방송학 전공했어요. 딸내미 유튜브 찍어주려고." 솔직히 말하자면 리뷰를 쓰고자 영화관에 앉아있는 현실이 다행이다 싶었다.

영화 <82년생 김지영>은 1982년도에 태어난 주인공 김지영(정유미)이 여성으로서 겪는 고충을 그렸다. 영화는 원작인 동명의 책보다 입체적이고 풍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영화는 김지영이라는 한 인물에 집중한 책과 달리 여성 직장 동료, 직장 상사 등 주변인들 에피소드를 적절히 다룬다. 이를 통해 자신이 경험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분명히 존재하는 불편과 공포가 있음을 말한다.

세대를 아우르는 여성의 삶도 그렸다. 82년생 여성과 그 어머니, 할머니 삶도 담았다. 영화는 마치 잘 정리한 한국근현대여성사의 몇 페이지 같기도 하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지만 놓인 상황에 따라 영화 내용에 깊이 공감하지 못하는 여성도 있겠다. 가령 오빠가 두셋 있는 집의 고명딸이라든지, 아직 결혼이나 육아를 경험하지 않은 여성이라든지.

하지만, 육아휴직에서 갓 복귀한 나에게 영화는 다큐멘터리처럼 느껴졌다. 마침 나는 영화 속 지영이처럼 딸 둘, 아들 하나인 집에서 자랐다. 막냇동생과 나이 차이가 10살이다. 당시 우리 엄마의 과업 역시 아들 생산이었던 거다.

▲ 영화 <82년생 김지영> 한 장면. /스틸컷
▲ 영화 <82년생 김지영> 한 장면. /스틸컷

지영이가 시내버스에서 또래 남학생으로부터 위협을 당하는 장면은 내 기억 속 저 구석에 있던 한 장면을 끄집어냈다. 고등학생 때다.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 시내버스 안에는 나와 한 남학생뿐이었다. 내 뒷자리로 온 그 남학생은 다음 정류장에서 내리려고 일어서는 내 어깨를 잡고 내리지 못하게 했다. 다행히 곧 다른 승객이 올라탔고, 몇 정거장 떨어진 정류장에서 내릴 수 있었다.

지영의 회사 여자 팀장을 두고 남자 직원들이 "독하다"고 평하는 장면에서는 나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그렇다. 분노의 한숨이다. 남편이 전해준 말이 떠올랐던 탓이다. 회사 부장이 "일이랑 육아를 함께 하는 여자들은 독하다"라고 했단다. 물론 남편의 태도는 '어쩜 그럴 수 있냐'였다. 그 부장에게 전화를 걸어 "왜 대단하다, 부지런하다, 멋지다가 아니라 독하다냐"라고 따지고 싶었다.

영화가 관객들 마음을 움직였나 보다. 영화 중간중간 훌쩍이는 소리와 한탄하는 소리가 경쟁하듯 들렸다.

누군가에게는 내 이야기 같은 이 영화가 사회적으로 논란이란다. 한쪽에서는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남성의 아픔은 배제했다고 항의하고, 한쪽에서는 '대졸자 중산층' 여성의 삶만 다뤘다며 섭섭해한다고.

감독 말마따나 이것 역시 지금 대한민국의 한 단면이겠다. 주인공 김지영은 한국사회라는 한 사람이 빚은 여성의 모습이다. 수제 그릇 같은 거다. 손으로 만들었으니 다른 것들과 크기도 모양도 조금씩 다르다. 왜 내 것과 모양이 똑같지 않으냐는 질문은 의미가 없다.

기사도 마찬가지다. 신문에 나올 만한 일이란 정말 특별한 일이다. 그럼에도 기사를 보며 따뜻한 미소를 짓기도 눈물을 훔치기도 한다. 영화 내용을 내가 몰랐던 내 엄마의 이야기, 내 친구의 이야기, 혹은 뉴스에 나오는 누군가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그리 억울할 일도 없겠다.

영화는 마지막 장면에서 원작과 결별한다. 더 깊은 절망을 보여준 책과는 달리 영화는 희망을 말한다. 영화 초반 김지영이 겪은 곤란한 상황을 영화 후반에 다시 겪게 된다. 달라진 김지영의 태도는 통쾌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변화는 혼자서 만들 수 없다. 영화 속 남편이 김지영을 상담사 앞에 데려가고자 끊임없이 노력한 것처럼, 전 직장 상사가 '너는 잘할 수 있다'고 믿어준 것처럼. 영화는 더디더라도 앞으로 나아가는 힘은 주변의 공감과 지지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나와 내 엄마, 내 이모의 이야기 같던 영화. 그러나 내 딸의 이야기는 아니기를 바란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