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무라이 농장 관련 한일학술회의
형성 과정 등 근대사 현장 조명 "학교 설립 등도 돈벌이 목적"

주제나 참석자, 장소 등 여러모로 음미할 구석이 많았던 행사였다. 지난 25일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 내 강금원 기념 봉하연수원에서 열린 한일학술회의 이야기다. 주제는 '누구를 위한 식민지 개발인가'다. 여기에 '경남 진영 무라이 농장의 형성과정을 중심으로'란 부제가 달렸다. 무라이 농장은 일제강점기 무라이 재벌이 지금 대산면과 그 주변을 중심으로 운영하던 거대 농장이다. 이날 학술회의는 무라이 농장 형성과 운영 상황을 살펴보는 것이 중심이었지만,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 25일 오후 2시 김해시 진영은 봉하마을에서 열린 무라이 농장 관련 한일학술회의에서 주제발표를 하는 우츠미 아이코(왼쪽 두 번째) 일본 게이센여학원대학 명예교수./이서후 기자
▲ 25일 오후 2시 김해시 진영은 봉하마을에서 열린 무라이 농장 관련 한일학술회의에서 주제발표를 하는 우츠미 아이코(왼쪽 두 번째) 일본 게이센여학원대학 명예교수./이서후 기자

◇지역사의 한 조각, 무라이 농장

무라이 농장(촌정농장)은 창원시 동읍과 대산면, 김해 진영읍 지역 근대사에서 중요한 조각 중 하나다. 무라이 농장은 무라이 형제상회라는 회사가 운영했다. 이 회사를 만든 무라이 기치베에(村井吉兵衛·1864~1926)는 메이지 시대 담배 산업으로 많은 돈을 벌었고, 이후 미국산 담뱃잎으로 만든 '히로'가 일본은 물론 중국, 대한제국 시기 우리나라에서도 큰 인기를 끌면서 일본에서 가장 큰 담배회사를 일궈낸다. 하지만, 러일전쟁 비용을 대고자 일제는 수익이 많았던 담배 사업을 국가독점으로 만든다. 담배 사업을 빼앗긴 무라이는 새로운 사업을 물색한다. 그 하나가 무라이 은행을 설립하고 고리대금업을 시작한 것이다.

▲ 낙동강반의 촌정농장./서울역사박물관
▲ 낙동강반의 촌정농장./서울역사박물관

무라이는 또 다른 사업으로 조선의 토지 개간에 관심을 둔다. 무라이 본사가 주목한 건 대산 들판이었다. 낙동강 배후습지로 토질은 좋았지만, 매년 홍수가 들어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땅이었다. 하지만, 일찍 근대화에 눈을 뜬 일본에는 앞선 토목기술이 있었다. 이 기술을 적용해 대산 들판을 개간해 농지로 만들면 큰 수익이 날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무라이 형제 상사 본사는 1905년에서 1906년 사이 당시 창원군과 김해군에 속한 대산 들판 토지를 공격적으로 사들인다. 이렇게 거대 농장을 구성한 후 본격적으로 제방을 쌓고, 배수 설비를 하는 등 개간을 시작한다. 낙동강에서 범람하는 물을 막으려고 제방을 쌓았는데, 그 흔적이 지금도 도로로 남아 있다. 예컨대 사진 명소가 된 창원시 대산면 죽동마을 메타세쿼이아길은 무라이 농장에서 만든 9호 제방이었다. 또 농지를 유지하려면 서쪽 산지에서 나오는 물을 저장할 유수지도 있어야 했는데, 기존에 있던 저습지를 활용했다. 주남저수지가 지금과 같은 모양을 갖추 게 된 이유다. <경남도민일보>가 올해 3월 근대유산으로 충분한 가치가 있다며 김해시 진영읍 주천갑문에 대해 보도를 한 적 있는데, 이 주천갑문도 무라이 농장이 대산 평야를 개간하면서 만든 것이다.

▲ 1912년 들어선 주천갑문의 전면 한가운데 모습. /김훤주 기자
▲ 1912년 들어선 주천갑문의 전면 한가운데 모습. /김훤주 기자

◇무라이 재벌의 양심적인 후손들

이번 학술회의의 중심에는 우츠미 아이코 게이센여학원대학 명예교수가 있다. 그는 일본 평화학회 전 회장인데 <조선인 B·C급 전범>이란 책으로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학자다. 이날 우츠미 교수는 일본에 남아 있는 무라이 본사와 진영 사무소 사이에 오간 업무 서한과 보고서를 토대로 농장 형성 과정을 발표했다.

우츠미 교수의 남편은 2013년 별세한 무라이 요시노리(村井吉敬·1943~2013) 전 와세다대 동아시아연구기구 교수다. 동남아시아에서 일본 식민지 침략 연구로 유명한 이다.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는데, 그는 무라이 농장을 만든 무라이 기치베에의 손자다. 요시노리 교수가 일본의 아시아 침략으로 고통받는 민중의 삶에 관심을 두게 된 이유도 할아버지의 무라이 농장 운영과 관련이 깊다. 미안한 마음에 그는 평생 진영과 대산을 찾지 않다가, 세상을 뜨기 전 딱 한 번 찾은 적이 있다.

그의 아내 우츠미 교수는 남편을 여윈 7년 전부터 무라이 농장 연구를 해왔다.

"무라이 농장을 운영하며 몇 번이나 홍수가 나 제방이 무너졌습니다. 그러면서도 포기를 안 했지요. 물론 무라이 재벌의 사업적인 노력에 대해서는 인정을 합니다. 무라이 재벌이 진영에 학교도 만들고 병원도 만들고 여러 시설을 만들기도 했죠. 하지만, 본사와 진영사무소가 주고받은 서한 중에 단 한 줄도 조선을 위해서라는 말은 없었습니다. 무라이 기치베에는 사업가였습니다. 무라이 농장도 경영의 하나로 생각했고 철저하게 개인의 이익을 위해 운영했던 거죠."

이날 학술회의는 앞으로 한일 공동연구를 위한 디딤돌이라고 해야겠다. 이날 행사가 민족문제연구소 주최로 열린 이유, 식민지 근대화론을 강하게 비판하는 허수열 충남대 경제학과 명예교수를 또 다른 발표자로 초대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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