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사원으로 잘나가다 일러스트·여행 작가로 전업
사람간 정에 끌린 통영서 '싸롱'열고 문화감성 살찌워

출판사 남해의 봄날에서 운영하는 통영 봉숫골의 동네 서점 봄날의 책방. 옆으로 난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면 거의 끝 부분에 '내성적싸롱 호심(湖心)'이 있다. 지난달에 정식으로 문을 연 곳이다. 어쩌다 한 번씩 찾는 관광객이야 그저 예쁜 카페이겠지만, 이곳은 일러스트레이터이자 여행작가인 밥장(본명 장석원·49)이 만든 공간이다.

최근 몇 년 통영에서 부쩍 재미난 공연이나 흥미로운 강연 등이 많이 열려 의아했었는데, 대부분 밥장과 관련이 있었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됐다.

▲ 일러스트레이터 밥장(본명 정석원)이 지난 13일 통영 봉숫골 '내성적싸롱 호심'에서 실크로드 여행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서후
▲ 일러스트레이터 밥장(본명 장석원)이 지난 13일 통영 봉숫골 '내성적싸롱 호심'에서 실크로드 여행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서후

밥장은 제법 유명한 일러스트레이터다. 10년간 다니던 대기업을 그만두고 서른 중반에 그림으로 밥벌이를 시작한 이력부터가 독특하다. 대기업 마케팅, 잡지 표지 작업도 많이 하고, 의류 브랜드에 그의 이름을 단 제품도 나온다. 좋아하는 일을 하며 먹고사는 사람으로 알려진 까닭에 강연 초대도 많이 받는다.

그는 2016년부터 통영에 정착해 살고 있는데, 그동안의 통영살이를 담은 그림일기를 모아 <밥장님! 어떻게 통영까지 가셨어요?>(남해의 봄날, 2019년 8월)란 책을 냈다. 그가 어떻게 통영에 살게 되었는지, 통영에서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가 담긴 책이다.

서울 토박이로 살아온 그가 통영에 관심을 둔 건 그의 본적이 통영이어서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통영에서 나고 자랐다. 나는 청량리 위생병원에서 태어났다. 호적법이 있던 때라 통영을 법적 고향인 본적으로 물려받았다. 어머니는 통영에도 잠깐 살았다고 하지만 서울에 산 기억밖에 없다. 서울에서 태어나고 통영을 물려받았지만 둘 다 고향으로 여긴 적은 없었다. 서울내기로 시골내기가 아니라는 데 만족했다. 하지만, 통영에 다녀와서 조금 달라졌다. 반짝이는 햇살과 우악스럽지 않은 바다, 올망졸망한 섬들이 마음에 들었다. 몸은 여전히 서울에 있지만 마음은 조금씩 푸르게 물들었다." (15쪽)

▲ 일러스트레이터 밥장이 그린 그림들. /이서후 기자
▲ 일러스트레이터 밥장이 그린 그림들. /이서후 기자

통영에 있으면서도 밥벌이를 위해서는 서울을 자주 오가야 하지만, 통영의 일상을 통해 그는 관광지가 아닌 통영의 진짜 매력에 푹 빠져들었다. 그가 서울에서 일을 마치고 통영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묘사한 부분을 보자.

"버스 정류장에 내려 두 번째 집까지 천천히 걸어 내려온다. 골목 하늘을 채우던 벚나무 잎들은 하루가 다르게 떨어져 바닥에 쓸린다. 흑백사진관 입간판과 모퉁이 카페를 지나 왼쪽으로 꺾으면 작은 책방과 전혁림미술관이 나온다. (중략) 짧은 거리인데도 동네 사람 한둘은 꼭 만난다. 그때마다 가벼운 인사만으로 넘어가는 법이 없다. 정원에 줄 비료는 냄새 안 나는 지렁이 흙이 좋다거나 새로 생긴 일본식 튀김덮밥집 튀김은 바삭하기보다 촉촉하더라 같은 깨알 같은 이야기를 길바닥에서 주고받는다. 5분이면 충분한데 10분, 20분이 걸리는 건 예사다." (153쪽)

이렇게 그는 통영에서 마음에 맞는 친구를 하나둘 사귀기 시작했고, 재밌는 일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여수 밤바다를 넘어 보자, 제대로 된 밤 문화를 일으켜 보자는 취지로 통영 밤바다 모임인 '통영야해'를 만들었다. 중앙동 이태리 포차 가두리, 쌍욕라테 울라봉 카페, 오래된 표구사 삼문당으로 자리를 옮긴 수다 카페, 정량동 수제맥주 펍 미륵미륵 그리고 내 두 번째 공간 봉수골 내성적싸롱 호심이 모였다. 먼저 여성들이 안전하고 깨끗하고 먹고 즐기며 묵을 수 있는 공간부터 만들기로 했다. 또한, 가뜩이나 작은 도시에 행사까지 겹치면 손님이 나뉠 수밖에 없다. 서로 일정이 겹치지 않게 정보를 공유하고 홍보도 함께 하기로 했다." (169쪽)

▲ 일러스트레이터 밥장이 운영하는 내성적싸롱 호심 입구. /이서후 기자
▲ 일러스트레이터 밥장이 운영하는 내성적싸롱 호심 입구. /이서후 기자

지난여름 2회째가 열린 통영인디페스티벌은 이렇게 의기투합한 이들이 공동으로 준비한 행사였다. 지금까지 통영에서 보기 어려웠던 젊음 가득한 잔치였다.

내성적싸롱 호심은 밥장이 통영에서 두 번째로 만든 복합공간이다. 첫 번째는 지금 살림집으로 쓰는 '믿는구석통영'이란 곳이다.

"통영에서 머물수록 사는 집 외에 사람들을 만나고 어울릴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친구들에게 정보를 얻고 부동산을 들락거리며 알아보았지만 위치나 크기, 가격이 맞지 않았다. 믿는구석통영처럼 나를 반기는 집은 없었다. 1년 반 동안 부지런히 발품을 팔아도 못 구했는데, 한 달 전에 느닷없이 나타났다. 집주인은 통영에서 나고 자라 오랜 시간 교직에 몸담은 화가로, 새우를 그린 문인화 작품으로 유명했다. 집을 지은 뒤 무려 40년을 살았지만 나이와 건강 때문에 할 수 없이 아파트로 옮기면서 급하게 내놓았다. (중략) 그토록 찾았던 나를 반기는 집이었다."

내성적싸롱 호심에서는 커피도 팔고, 맥주도 팔지만 때로 강연과 북토크가 진행되고, 글쓰기나 그림 교실도 열린다. 운이 좋으면 밥장과 낮맥(낮에 마시는 맥주)을 마실 기회도 생긴다.

지난 일요일(13일) 저녁에도 이곳에서 주인장 밥장이 최근에 낸 <여행, 작품이 되다>(시루, 2019년 9월)를 주제로 북토크가 열렸다.

▲ 일러스트레이터 밥장이 <론리플래닛 매거진 코리아> 10월호에 기고한 통영 이야기. /이서후 기자
▲ 일러스트레이터 밥장이 <론리플래닛 매거진 코리아> 10월호에 기고한 통영 이야기. /이서후 기자

<KBS 1TV>에서 지난달 20일부터 지난 3일까지 특집 다큐멘터리 4부작 <매혹의 실크로드>(김무관·김정희 연출)가 방영됐다.

한국 예술가 3명이 경주를 시작해 중국, 중앙아시아, 인도, 이란까지 실크로드 지역을 찾아 춤과 음악, 기예 등을 체험하는 내용이다. 예술가 3인 중에 무용가 차진엽, 작곡가 원일을 포함해 밥장이 있었다. 이 책은 밥장이 다큐멘터리 촬영 기간 쓴 그림일기다. 사실 밥장은 일 년에 한 달은 외국에서 지낸다는 여행 마니아다.

이런 경험으로 <호주 40일>(시루, 2017년) 같은 글과 그림이 함께하는 책도 몇 권 썼다.

이날 북토크를 진행하는 모습을 가만히 보니 그가 서울을 떠나 통영으로 온 마음이 대기업을 그만두고 일러스트레이터가 된 마음과 다르지 않다고 느꼈다. 일러스트레이터가 된 게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라면 통영에 정착한 것은 '좋은 곳에서 좋은 사람들과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라고 할까. "앞으로 이 공간에서 많은 행사가 있을 거예요. 싸롱이라 이름을 붙인 것도 그 때문입니다. 취향이 있는 분들이 술 말고도 저녁에 함께할 것들을 계속 만들어볼 생각이에요."

생활에 지친다고 느낄 때 문득 통영에 있는 밥장을 만나러 가보는 것도 좋겠다. 특별한 깨침을 얻는다기보다는 그저 그곳에 그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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