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음 멈추고 삶 돌아보는 시간
폭력의 시대에도 낭만 있으라

세상살이와 너무나 동떨어진 무용하고 아름다운 것들에 집착한다.

가을이 왔다. 하나의 계절이 아니다. 하나의 색깔도 아니다.

9월을 초추라고 하지만 여름의 열기가 남아있어서 시종일관 녹색이었다. 중추가 되면서 물관에 남은 마지막 녹색을 밀어내고 나무는 단풍으로 물들어 간다. 만추가 되면 물관에는 녹색이 마르고 말라 들어 낙엽이 완성된다.

이렇듯 가을의 색깔은 한 가지에 머물지 않는다. 계절도 분절되어 초추(初秋)·중추(仲秋)·만추(晩秋)로 나누어진다.

한 계절 속에 3개의 또 다른 계절이 있듯이 낙엽은 녹색과 빨간색, 주황색, 노란색 등 오색이 공존한다. 나뭇잎들은 연녹색에서 출발하여 단풍으로 변했다가 낙엽이 되는 3단계 반전이 있다.

그래서 만추가 주는 계절감은 서사적이다. 또 그래서 가을에서 만추를 따로 떼 내 추억할 줄 아는 사람은 멋을 아는 사람이다.

절정의 시간이 끝나고 바닥에 떨어져 뒹구는 낙엽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스산한 바람에 밀려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낙엽은 과학이고, 문학이고, 융합언어이다. 사랑이고 이별인 만추는 사람들을 유신론자로, 철학자로, 시인으로 만드는 모양이다.

만추의 절정은 아마도 울긋불긋 물든 단풍이 마르고 시들어 낙엽으로 변해 바람에 나뒹굴기 시작하는 그 시점일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서 사랑에 빠지고 그 사랑이 불가피하게 이어지지 못하여 헤어지면서 나누어야 하는 아픔을 담기에는 2박 3일이 너무 짧은 시간인가! 72시간의 사랑!

화장기 없는 서늘한 눈매의 중국 배우 탕웨이는 시종일관 황색 코트와 머플러를 날리면서 표정만으로 영화를 완성했다. 영화가 끝나고도 감독과 여배우는 사랑을 하고 이어서 결혼까지 했다.

짧게 지나가는 가을을 온전하게 담은 영화 <만추>는 이만희 감독의 1966년 작이 원본이다. 필름이 소실되어 다시 볼 수 없는 영화가 되었지만, 1975·1981년에 각각 리메이크되었다. 1987년에는 TV문학관에서, 그리고 또 연극으로, 가을을 만든다.

영화를 보고 난 뒤에 영화와는 무관하게 깃을 세운 코트 안에서 비로소 걸음을 멈추고 삶을 돌아보게 된다. 자신이 서 있는 자리와 그곳까지 왔던 길을,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잃어버린 것과 잊고 사는 것을 생각해 낸다.

위대한 존재와 초라한 존재가 시간과 공간을 달리하면서 섞이고, 같은 순간 같은 공간에도 그 위대함과 초라함, 영광과 경멸의 조각은 겹치고 얽힌다.

청춘의 고난과 그 치열한 결핍이 만들어낸 위대한 성취, 그 찬란한 업적이 권력이 되고 권위가 되면, 필연적으로 훨씬 더 쉽게 변절하고 훨씬 더 쉽게 타락한다.

만추는 인연과 추억을 되새김질하는 계절인가 보다. 미련의 계절인가 보다. 마음속의 단풍은 오색을 갖고 낙엽으로 뒹군다.

알베르 카뮈도 "가을은 모든 잎이 꽃이 되는 두 번째 봄"이라고 했다.

그래도 시대의 변화에 대한 반동이라고 할까, 아니면 구세대의 저항이라고 할까. 좀비가 극성인 이 시국에 로맨스 그레이(Romance Grey)는 사치스럽기도 하고 폭력의 시대에도 낭만은 있다던 시인처럼 이래도 되나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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