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의 할리우드'라 불리던
미공보원 상남영화제작소
중앙동 옛터에 표지 세워

동양의 할리우드라 불리며 한국 영화사에 큰 영향을 끼친 주한미국공보원(USIS) 상남영화제작소 옛터인 창원시 중앙동에 지난 15일 드디어 공식적인 표지판이 생겼다. 지역에서 상남영화제작소 논의가 시작된 지 7년 만이다. 특히 올해가 한국영화 100년을 맞은 해여서 더욱 의미가 있다.

상남영화제작소가 1952년부터 1967년까지 15년 동안 만든 1000편 이상의 영상과 영화는 당시 미국의 대내외 핵심 선전기구 노릇을 했다. 영화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던 1950∼60년대에 높은 기술 수준의 영상들이 창원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특히 이곳에서 일하던 한국 직원들이 사실상 한국 영화인 1세대들인데, 이후 한국 영화 산업의 인력 기반이 된다.

상남영화제작소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2012년 한 논문으로 시작됐다. 창원대 사회학과 이성철 교수가 <경남도민일보>에 최초 공개한 <지역 영화사 오디세이 : 1950년대 경남지역 미국공보원(USIS)의 영화제작을 중심으로>다. 이 교수는 논문에서 상남영화제작소를 두고 창원을 대표하는 문화 역사 브랜드라고까지 평가했다.

▲ 지난 15일 오전 창원 중앙평생학습센터 입구 상남영화제작소 표지판 앞에 선 창원대 이성철 교수를 김재한(오른쪽) 감독이 촬영하고 있다. 한국영화 역사의 현장에서 김 감독이 작은 영상 장비를 이용해 촬영하는 모습 속에 영화·영상 기술 발전상이 엿보이기도 한다. /이서후 기자
▲ 지난 15일 오전 창원 중앙평생학습센터 입구 상남영화제작소 표지판 앞에 선 창원대 이성철 교수를 김재한(오른쪽) 감독이 촬영하고 있다. 한국영화 역사의 현장에서 김 감독이 작은 영상 장비를 이용해 촬영하는 모습 속에 영화·영상 기술 발전상이 엿보이기도 한다. /이서후 기자

상남영화제작소 옛터가 창원시 중앙동이어서 그랬을까. 2015년부터 경남정보사회연구소가 중앙동에서 운영하는 중앙평생학습센터와 이성철 교수의 인연이 시작된다. 이해에 이 교수는 <경남지역영화사 - 마산의 강호 감독과 창원의 리버티늬우스>(호밀밭, 2015년 5월)를 낸다. 같은 해 중앙평생학습센터는 이 교수 강연과 함께 '미공보원 상남영화제작소 흔적을 찾아서'란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이때 중앙동 토박이 문종대(84), 김기하(84) 어르신에게서 중앙파출소 앞에 정문이 있었다는 사실과 지금은 주택가가 된 그 앞 언덕배기에 본 건물이 있었다는 증언을 확보한다. 이를 토대로 2017년 박영주 경남대 박물관 비상임연구원이 국토지리정보원 1950~1970년대 항공사진과 현재 지도를 활용해 정확한 위치를 확인했다. 전체적으로 보면 현재 중앙평생교육센터에서 여우비 어린이공원까지다.

이를 보도한 <경남도민일보> 기사를 보고 당시 해군으로 건물 경비를 섰던 이학진(74) 어르신이 나타난다. 그가 공개한 건물 사진에는 'USIS-MOTION PICTURE PRODUCTION CENTER(주한미국공보원)'란 영문이 선명하다. 이 사진은 지금도 여러 곳에서 상남영화제작소 증거 사진으로 쓰이고 있다.

15일 상남영화제작소 옛터 표지판은 중앙평생학습센터 입구 옆 벽에 세워졌다. 처음에는 정문 자리에 바닥 동판을 세우려고 했는데, 그러기엔 2016년 시작한 표지석 후원금 모금액이 넉넉하지 않았다.

이날 오전 10시 이성철 교수와 문종대, 이학진 어르신 등 옛터 찾기에 공헌한 이들이 참여한 표지판 제막 기념식이 열렸다. 조촐했지만, 상남영화제작소를 공간적으로 공식화한 의미 있는 출발이기도 했다.

상남영화제작소 관련 자료와 이곳에서 만든 영상은 12월 4일까지 경남도립미술관 3층에서 열리는 '도큐멘터 경남 I 기록을 기억하다' 전시에서 볼 수 있다.

특히 봉준호 감독이 한국 영화의 위대한 거장이라고 치켜세운 김기영 감독이 상남영화제작소에서 만든 첫 영화 <죽엄의 상자>(1955년)를 제4전시실에서 상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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