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돌담 골목 아늑하고 정겨워
모양 달라도 균형 이룬 담장처럼

가을은 하늘에서 내려온다고 했던가. 늦은 장마 지나 보내고 모진 태풍 셋이나 겪고서야 하늘은 마침내 평온해졌다. 바뀐 계절을 핑계 삼아 고향 나들이를 하고 왔다. 세상이 빠르게 변해온 중에도 그 속에 깃든 맑은 정신만은 세월에 바래지 않고 예전 모습을 오롯하게 간직한 예담촌에 들렀던 거였다.

고풍스러운 전통 가옥들이 돌담과 어우러진 이 마을의 매력은 노인의 허리처럼 구부정하게 휜 흙돌담 길이다. 골목의 정경이 무척이나 서정적이기 때문이다.

야트막한 산자락을 병풍 삼아 기와집들이 옹기종기 모인 마을의 담장은 전돌로 쌓은 하방담(下枋牆)이 아니다. 권문세가의 화초담(花草牆)처럼 화려하지도 않다. 그저 돌과 흙을 번갈아 가면서 쌓고 기와로 지붕을 이은 소박하면서도 단아한 흙돌담이다. 투박한 솜씨로 울퉁불퉁 모양이 제각각인 돌멩이를 토담에 꾹꾹 박아놓은 것 같은 담장을 가만히 만져볼라치면 옛사람들의 손길인 양 따뜻하고 정겹게 마음을 다독여준다.

담쟁이넝쿨이 감싸고 있는 조붓하고 아늑한 골목길은 더 운치가 넘친다. 어슬렁어슬렁 골목 깊숙이 들어설수록 그 걸음 따라 나의 마음도 자꾸 과거로 흘러간다. 미로처럼 이어진 골목은 끝이 없다. 그저 이 집에서 저 집으로, 또 그다음 집으로 연결된다. 골목은 집을 둘러막거나 경계를 가르는 길이라기보다 닫힌 듯 열려있고, 끊어질 듯 이어지는 소통의 통로인 셈이다. 대문만 나서면 이웃 사람들과 마주치면서 자연스레 마음의 끈이 촘촘하게 엮였고, 함께 삶의 터전을 꾸려나가며 이웃사촌이 되었다. 서로 속마음 털어놓고는 하소연도 하고 흉도 보고, 그러면서 응어리를 풀었던 인간적인 교감의 공간이었다.

골목길이 아름다운 건 그 속에서 살아온 이들의 이야기가 유쾌하게 숨 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감자를 삶거나 부침개를 부친 날이면 담장 위로 채반이 넘나들었고, 옆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 알 수 있을 정도로 동네가 한 가족처럼 지내던 시절이 있었다.

심성 곱고 눈물 많은 사람, 언제나 제 일처럼 앞장서는 바지런한 사람, 입바른 소리 잘하는 꼿꼿한 사람, 호기심 강하고 장난기 많은 사람, 눈치 빠르고 영악한 사람부터 후덕하고 인심 많은 사람까지 함께 어울려 살았다. 큰 돌 기운 곳에 작은 돌이 떠받치고 둥글고 모난 돌 사이엔 진흙이 그 틈을 메워 균형을 이룬 흙돌담처럼, 그때 그 시절 우리 동네 사람들은 네 것 내 것 구분하지 않고 의좋게 살았다.

오랜 세월의 무게에도 형태가 흐트러지지 않고 늠연하게 버티고 있는 것은, 돌멩이마다 그 모양새와 크기에 따라 제 역할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리라. 모나고 못생긴 돌멩이들이 모여 담장을 이루듯이 가진 것 없고 내세울 것도 없는 인생이라 할지라도 나름대로 소중한 존재감을 안고 이 세상을 든든히 떠받치는 역할을 하며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반으로 나뉘어 분열되고 있다. 제자리에서 그 역할과 책임을 다해야 할 민중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담장이 허물어질까 두렵다. '내 편만 옳다'는 극단의 정치가 판을 친다. 공동체적 정의가 정치권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 볼썽사나운 모습에 민초들의 한숨은 더욱 짙어지고 있다. 앙잘앙잘 미워하지 않고 둥글둥글 살아가던 옛날이 더 사무치게 그리운 이유이다. 아, 옛날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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