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 '게일릭' 독립운동 상징 자부심
항일 일환 기획된 전국체전은 찬밥 전락

켄 로치 감독에게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안긴 영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아일랜드의 한 시골 마을 청년들이 들판에서 한가롭게 헐링(주걱처럼 생긴 스틱으로 공을 치는 아일랜드 전통 스포츠)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놀이처럼 경기를 마친 청년들이 마을로 돌아와 가족들과 이야기를 나눌 즈음 대검을 장착한 총으로 무장한 영국군이 들이닥친다. 영국군은 마을 청년들을 창고 벽에 나란히 세운 뒤 거칠게 취조하며 신원을 확인한다. 그 자리에서 영국식 이름 대기를 거부한 한 청년은 창고 안으로 끌려가 죽임을 당한다.

영국군이 마을에 들이닥친 이유는 마을 청년들의 헐링 경기 때문이었다. 영화의 배경인 1920년 아일랜드를 식민지배하던 영국에 헐링은 엄연한 '불법 집회'였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영국인은 하지 않는 자기만의 전통 스포츠를 핑계로 자주 모여 정보를 교환했고, 자기 정체성과 연대감을 확인하는 동시에 독립운동 자금도 모금했기 때문이다.

이 독특한 스포츠는 1884년 게일릭체육협회(Gaelic Athletic Association)가 만들어지면서 체계를 갖추기 시작했다. 유럽 전역에서 민족 단위의 국민 국가 건설 열망이 뜨겁게 일어나던 그때 아일랜드에서도 다양한 분야에서 '각성' 내지 '부흥' 운동이 일어났는데, 게일릭체육협회도 그중 하나였다. 영국 정부가 헐링을 불온하게 볼 수밖에 없는 맥락이 19세기 말부터 형성된 것이었다.

아일랜드에서 게일릭 스포츠의 인기는 오늘날도 지속하고 있다. 전국 32개 카운티에 지역협회 소속 클럽 숫자만도 2000개가 넘는다. 매해 9월 열리는 전국 챔피언십 대회는 카운티별 대항전으로 치러지는데 주요 경기가 펼쳐지는 더블린 크로크 파크의 8만 2000석은 매번 매진될 정도로 인기가 뜨겁다.

아일랜드 사람들에게 게일릭 스포츠는 민족적 자부심과 지역의 자부심을 상징하는 중요한 문화코드 중 하나다.

아일랜드에 게일릭 스포츠가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전국체전'이 있다. 올해 100회째를 맞은 전국체전은 그 기원을 1920년 11월 배재고보 운동장에서 개최된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에 두고 있다. 3·1운동이 일어난 지 1년 뒤였다.

1930년대에는 몽양 여운형 선생이 조선체육회 임원과 회장을 두루 맡아 체육계 전반을 이끌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이 금메달을 딴 것도, 시상식에서 손기정이 월계수 화분으로 일장기를 가린 것도, 이를 보도한 <조선중앙일보>와 <동아일보>가 사진에서 일장기를 말소한 것도 식민지 조선에서 체육이 어떤 의미를 뒀는지를 잘 보여준다. 전국체전 홈페이지에 나와 있듯이 당시 체육은 항일과 민족각성운동의 일환이었다.

지난 10일 제100회 전국체전이 막을 내렸다. 17개 시·도와 18개 국가에서 2만 5000명에 이르는 선수단이 참가한 역대 최대규모 대회였다. 그러나 대통령과 아이돌 그룹이 등장한 개막식을 제외하면 화제가 된 장면이 거의 없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빠른 선수를 뽑는 100m 달리기 결승에도 관중석은 텅텅 비어 있었다. 경남은 종합 4위로 준수한 성적을 올렸지만 관심을 둔 경남도민 찾아보기가 하늘의 별 따기다.

아일랜드에선 게일릭 스포츠가 여전히 자부심의 상징인데, 전국체전은 어쩌다 그 누구도 관심 주지 않는 '그들만의 행사'로 전락했을까?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보자. 전국체전이 항일과 민족부흥운동의 일환으로 기획됐다는 의미를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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