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극로·이우식·안호상 선생 일제 맞서 조선어 독립 이바지
한글학회 박물관 의령 건립 제안

"조선어 독립을 위한 조선어학회 활동에는 단연 의령 출신인 고루 이극로, 남저 이우식, 한뫼 안호상 선생이 중심이었다."

의령문화원 김복근 박사가 지난 8일 열린 '의령의 인물과 학문'이라는 주제의 학술발표회를 통해 조선어학회 활동을 소개했다.

김복근 박사는 이날 학술발표회에서 고루 이극로 선생은 총괄 기획과 실무 책임을, 남저 이우식 선생은 재정지원에서 실질적인 책임을, 한뫼 안호상 선생은 고도의 전문성을 요구하는 철학과 윤리학, 논리학, 심리학 분야의 실무 책임 역할을 도맡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은 백산 안희제 선생의 적극적인 후원과 안석제 선생의 도움이 컸으며, 그 이면에는 서로 믿고 의지하는 신뢰관계가 바탕이 됐다고 덧붙였다.

▲ 김복근 문학박사가 8일 의령군민회관에서 '의령의 인물과 학문'이라는 주제로 발표를 하고 있다.  /조현열 기자
▲ 김복근 문학박사가 8일 의령군민회관에서 '의령의 인물과 학문'이라는 주제로 발표를 하고 있다. /조현열 기자

이우식 선생에 대한 신뢰가 없었다면 안희제 선생이 일제의 눈을 피해가며 독립자금을 내놓을 리 없었고, 이극로 선생에 대한 믿음이 바탕 되지 않았으면 조선어사전 편찬자금 지원도 불가능한 일이었다는 것이다. 김복근 박사는 이극로, 안호상, 신성모 선생에 대한 학자금 지원 또한 서로 신뢰가 바탕이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강조했다.

안희제 선생은 그 혹독한 고문에도 말 한마디 하지 않았고, 동지의 안위를 지키면서 끝내 순국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일제강점기 안희제 선생과 안호상 선생의 혈연과 이우식, 이극로 선생의 학연이 어우러져 악랄한 일제의 고문과 강압에 의해 생명을 빼앗기면서까지 비밀을 지켜 동지를 살렸고, 조선어 독립과 나라를 되찾는 데 이바지하게 된 것이라 밝혔다.

김 박사는 이어 기록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절감한다면서 이극로 선생은 회고록 <고투 40년>을 펴냈고, 안호상 선생은 <한뫼 안호상 20세기 회고록>을 남겼으나 일제강점기 그 암울하고 혹독한 시련의 시대를 살면서 임정 첩보 활동을 해온 안희제 선생은 기록을 남길 수 없었다고 분석했다.

특히, 그에게 독립자금과 군자금 전달을 의뢰한 분들의 업적이 누락돼 실질적인 독립운동을 했음에도, 그 근거를 밝힐 수 없는 분들이 많을 것으로 추정했다.

또 이우식 선생은 자신의 행적을 과시하거나 내세우지 않으려는 성품때문에 세세한 내용을 밝히기가 어려웠고, 이극로, 안호상 선생의 회고록과 일본의 재판기록, 선행연구, 후손과 지역민 증언을 통해 조선어학회 독립운동에 관련된 그들의 역할을 상당부분 밝히게 됐다고 주장했다.

▲ 왼쪽부터 신성모, 이극로, 안호상. /박용규 이극로연구소장
▲ 왼쪽부터 신성모, 이극로, 안호상. /박용규 이극로연구소장

이에 김복근 박사는 의령에 조선어학회(한글학회) 박물관 건립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김 박사는 "조선어학회는 의령어학회로 일컬어질 만큼 의령 출신의 고루 이극로, 남저 이우식, 한뫼 안호상, 백산 안희제 선생 등이 주요한 역할을 했다"며 "남은 자료를 토대로, 의령에 조선어학회(한글학회) 박물관을 건립해 이를 추모하고 더 발전시켜 나갈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또 마산 창동 학문당서점 부근 중성동 136번지에는 고딕 양식의 2층 목조 기와집(지금은 외형상 시멘트 건물로 보임)이 있었는데, 이곳이 90여 년 전 남저 이우식 선생이 살던 집이라고 주장했다. 역시 기념관 복원과 교육의 장 활용 등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김 박사는 "이우식 선생은 마산에서 원동무역과 경남은행을 운영하면서 상해임시정부 독립자금 지원과 조선어사전 편찬기금을 후원했다"며 "역사적 가치를 볼 때 이우식기념관 복원과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는 등 그의 삶과 사유방식에 대한 재조명 작업이 더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기를 희망한다"고 역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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