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부조리 앞에서만 고개 숙인다면
'기레기·검새·짭새'불려도 할 말 있나

2017~2018년 경남도민일보 노동조합 지부장을 하면서 없던 능력이 생겼다. 5층에 있는 조합 사무실로 들어오는 걸음 소리만으로 조합원 소속을 얼추 맞추게 됐다.

일단 사무실 입장이 소란스럽다 싶으면 대부분 편집국 소속 기자였다. 조금 과장을 보태서 "너희들은 쿵쿵·씩씩거리면서 들어온다"고 말하곤 했다. 반면 기척도 없이 들어와 낮은 목소리로 지부장을 부르는 조합원 대부분은 경영국 소속이었다.

대화를 시작하는 방식도 다르다. 기자들은 일단 지르고 시작한다. 뭐가 문제다, 조합에서는 뭐 하느냐, 지부장은 어떻게 대응할 것이냐 같은 식이다. 주제부터 앞 부분에 집중 정리하고 뒤로 가면서 하나씩 풀어내는 기사 쓰기 형태를 '역피라미드 방식'이라고 한다. 한참 성내던 조합원과 함께 차차 감정과 오해했던 지점을 정리하고 나면 나중에 이런 핀잔을 주기도 했다.

"너는 말은 제대로 역피라미드 방식으로 하네. 기사도 앞으로 그렇게 쓰면 되겠다."

경영국 소속 조합원 대부분은 "혹시 이야기할 시간이 되겠느냐"는 양해로 대화를 시작한다. 조합원 이야기를 듣는 게 지부장 기본 업무인데도 그렇다. 얘기 진행과 단어 선택도 훨씬 조심스럽다. 어쩔 때는 긴장 없이 한참 얘기를 듣고 나서야 심각성을 인지하기도 했다.

이처럼 표현 방식에서 나타나는 뚜렷한 차이는 '을(乙)' 경험 유무가 아닐까 짐작한다. 지원·영업 업무가 많은 경영국 사원은 을 처지에 익숙하다. 자기 주장을 내세우는 만큼 상대 처지를 고려하는 게 체화된 편이다. 반면 기자는 입사 때부터 을이 되지 않는 태도를 미덕으로 배운다. 권력 앞에 주눅 들지 말고 저널리즘을 성취하라는 요구인데 '허용된 악', '나빠도 되는 권리' 정도로 정리하자. 범인보다 더 나쁜 형사가 범인을 잘 잡는다는 통념과 다를 게 없는 구조다.

부조리와 맞서는 일은 '악할 권리'를 동반한다. 그 권리는 정확하게 부조리 앞에서 작동할 때만 인정받을 수 있다.

그 귀한 권리를 대가를 받으면서 행하는 이들에게 향하는 사회적 기대라는 게 당연히 있다. 그 기대를 채우지 못한 수요자가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 기껏 혐오를 담은 별칭이다. 권력과 부조리 앞에서만 멈추는 '악할 권리'를 누리는 자는 평균 인성 수준에 못 미치는 나쁜 놈, 덜 성숙한 놈일 뿐이다.

민망하지만 바로 며칠 전 유럽 다녀온 티를 조금만 내보겠다. BBC 관계자에게 물었다.

"최근 한국 기자들은 특정 기관에서 나온 일방적인 정보를 사실 확인 없이 일단 보도부터 하면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오보에 책임지는 일도 없습니다. BBC 보도 기준에서 보면 어떻습니까?"

"한 가지 정보가 전혀 다른 두 가지 루트를 통해 확인됐을 경우 보도하는 게 원칙입니다. 이 때문에 보도가 늦어진다고 해도."

기자 -기레기, 검사 -검새, 경찰- 짭새 사이에서 징징거릴 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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