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희경 7년 만의 장편소설
서로 과거 달리 기억하는
대학시절 함께한 인물들
'지금의 나'곱씹도록 배치

사람은 누구나 주변 사람들로부터 어떤 방식으로든 영향을 주고받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사람은 남동생이다. 미술을 전공하는 남동생은 언제나 그래 왔지만, 작년부터 함께 책방을 운영하면서 이전 어느 때보다 많은 것들을 공유하고 대화하는 사이가 되었다.

내 동생은 대부분의 시간을 그림을 그리거나 그리고 싶은 것을 생각하는 것으로 보내는데,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런 동생과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자 나 역시 그림에 대해 자연스럽게 흥미가 생기게 되었다.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에 나를 포함한 몇 사람이 모여 동생에게 그림을 배우게 되었다. 모임은 어떤 형식이나 주변의 평가와 상관없이 그저 그림을 그리면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목적이자 효용 가치라 생각하는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모임에 앞서 그림에 대한 기본적이고 기초적인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에는 모두가 동의했기에 간단하게나마 그림을 그리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재료와 형태에 관해 배우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그렇게 우리는 그림을 배우는 첫 시간에 아주 중요한 이론, '빛'에 대해 배우게 되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빛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빛이 없다면 물질을 분별할 수 없고, 빛에 따라 생기는 그림자와 형태를 알아야지만 원하는 그림을 그릴 수 있기 때문이다.

상황에 따라 빛에 대한 정의는 다를 수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빛은 아주 먼 곳 어딘가로부터 출발해 이곳에 닿게 된다. 그리고 그 빛이 흡수하고 반사하는 것에 따라 우리는 우리 주변의 사물이나 상황을 분별하게 되는 것이다.

어디인지,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지만 과거의 어떤 시점으로부터 시작된 빛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빛'이라는 물질이 가진 속성이 마치 우리 인생의 시간 흐름과도 연결되어 있는 것만 같다. 빛이 내뿜는 파장에 따라 그림자가 제각기 길고 짙어지는 것처럼 과거에 했던 행동 역시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어떤 경로를 지나 현재라는 모양의 저마다 다른 그림자들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닐까.

지난 8월 말, 은희경 작가는 <태연한 인생> 이후 7년 만의 장편소설 <빛의 과거>로 독자들을 다시 만났다.

▲ 은희경 장편소설 <빛의 과거> 표지.
▲ 은희경 장편소설 <빛의 과거> 표지.

깊이 숙고하며 여러 번 고쳐 썼다는 소설 <빛의 과거>는 출신지와 부모로부터 벗어나 서울 생활을 시작한 이십 대 초반 여자 대학생들의 기숙사 생활을 다루고 있다. 성년이 된 여성들이 기숙사라는 낯선 공간에서 겪게 되는 일련의 일들을 통해 서로가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주고받는지, 같은 상황이지만 편집된 기억 속에서 어떻게 지난날을 달리 추억하는지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야기는 2017년, 중년 여성인 김유경이 친구 김희진의 소설 <지금은 없는 공주들을 위하여>를 읽으면서 시작된다. 화자인 '나' 김유경과 김희진은 대학 동창으로 40년 가까이 친구로 지내왔지만 특별한 절친함이나 끈끈한 유대감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저 어쩌다 보니 서로가 알고 지낸 지 가장 오래된 친구로 남게 되었을 뿐.

지난날, 같은 시공간을 공유했던 그녀들이지만 김희진의 소설 속에 묘사된 대학교 기숙사 생활은 김유경의 기억과는 전혀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1977년 3월, 기숙사 생활은 방마다 각각 4명의 학생들을 임의로 배정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김유경이 소속된 322호의 룸메이트로는 화학과 3학년 최성옥, 교육학과 2학년 양애란, 의류학과 1학년 오현수로, 3학년 최성옥의 절친한 친구인 송선미의 방 417호 학생들과 자주 어울리게 된다. 그 과정에서 김유경은 김희진을 만나게 되고, 한 기숙사에 살게 된 그녀들은 3월의 신입생 환영회와 미팅, 축제, 가을의 오픈 하우스와 같은 크고 작은 학교 행사를 함께 겪는다.

 

"기숙사는 출신지와 부모로부터 벗어나 서울 생활을 시작한 이십대 초반 여자 대학생들의 집단이었다. 그들은 각기 다른 지점으로부터 다른 조건을 지니고 떠나왔다. 이제 스스로가 자신의 인생을 꾸려가야 하는 만큼 의식하든 안 하든 자기라는 존재가 다름의 형태로 드러나게 되어 있었다. 같은 생활공간에서 그 다름은 더욱 두드러질 것이다. 그리고 그 개별적인 '다름'은 필연적으로 '섞임'으로 나아가게 되는데, 거기에는 비극이라고 이름 붙일 만한 서투름과 욕망의 서사가 개입될 수밖에 없었다."(<빛의 과거> 중에서)

 

소설 속 서술자의 시점이 2017년에서 1977년으로 바뀔 때 은희경 작가는 화자인 김유경의 입을 빌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속 "군대의 비극은 섞인다는 것이다"라는 문장을 독자에게 던져 놓는다. 군대는 아니지만 기숙사라는 환경 속에서 그녀들은 '다름'이 무엇인지 채 인지하기도 전에 '섞임'을 먼저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독자인 우리 역시 책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322호와 417호의 학생들, 그녀들의 데이트 상대, 사감 언니와 교내 인물의 관계 속에 섞여든다. 그 속에는 사회와 편견에 부딪히는 인물, 세속적인 가치에 휘둘리는 인물,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고자 하는 인물, 무리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취향을 발전시키는 인물과 같이 다양하고도 입체적인 형태의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그녀에게는 그 시절 내가 겪어야 했던 방식과는 전혀 다른 '다름'과 '섞임'의 세계가 있었다. 그 시절 우리에게는 수많은 벽이 있었다. 그 벽에 드리워지는 빛과 그림자의 명암도 뚜렷했다. 하지만 각기 다른 바위에 부딪쳐 다른 지점에서 구부러지는 계곡물처럼 모두의 시간은 여울을 이루며 함께 흘러갔다. 어딘가에 도달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때 우리 모두는 막연하나마 앞으로 다가올 시대는 지금과 다를 거라고 믿었다."(<빛의 과거> 중에서)

 

▲ 작가 은희경이 <태연한 인생> 이후 7년 만에 내놓은 장편소설 <빛의 과거> 한 쪽.
▲ 작가 은희경이 <태연한 인생> 이후 7년 만에 내놓은 장편소설 <빛의 과거> 한 쪽.

소설 속에는 여러 종류의 인물이 등장하지만 단언컨대 이 소설 전반을 이끄는 두 명의 주인공은 김유경과 김희진이다. 극중 유경은 말을 더듬는 자신의 약점 때문에 자신의 욕망을 무조건적으로 억누르는 회피형 인간으로 자신의 약점이 드러나지 않기 위해 모범과 순종을 무기 삼아 어중간한 위치에 있고자 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김희진이 판단한 김유경은 그야말로 자신의 연약함에 도취된 인물로 회피를 방어의 수단으로 내세우는 사람에 불과하다.

한편 김희진 역시 소설 속에서 본인을 약자와 피해자로서 설정하는 동시에 김유경과는 다르게 세상의 권력이나 부조리에 비판적인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런 희진 역시 공평함이나 정의를 위해서 나서는 사람이 아니라 권력의 구조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욕망에 이끌려 움직이는 사람에 불과하다.

희진은 소설 속에서 기숙사 생활을 했던 친구들을 '공주들'이라 일컬으며 그들의 나약함과 약점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독자는 그런 냉소 속에 숨어있는 자기합리화와 비겁함을 쉽게 발견하게 되지만 어쩐지 유경과 희진, 그리고 '공주들'을 쉽게 비난할 수만은 없다. 책을 읽으며 우리는 모두 왜곡된 기억을 가지고 살며 언제나 자신을 비롯해 모두를 오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녀들이 청춘을 보내야 했던 시대의 강압성과 특수성은 그녀들에 대한 동정심마저 일게 만들기 때문이다. 서로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그녀들이지만 결국 '각기 다른 바위에 부딪쳐 다른 지점에서 구부러지는 계곡물처럼' 시대와 문화적인 흐름에 따라 함께 흘러가고야 마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이 교차된 '빛의 과거'라는 말은 과거에 쏘아진 빛이 현재에 어떤 모습을 연출해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과거는 달라지지 않지만 과거에 대한 해석이 '나'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지금 내 인생은 빛이 만든 풍경이고 이 빛은 과거에서 왔다. 그 빛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자기 좌표를 새로 읽어낼 수 있다는 생각으로 썼다"라는 작가의 말처럼 우리의 빛의 과거는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에게 닿는다. 어떤 그림자를 만들어 낼 지, 어떤 형태로 그 빛을 받아들일지 정할 수 있다는 사실은 위안이 아닐 수 없다.

※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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