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령 고된 심신 회복한 곳…정자 주변으로 산수 으뜸이라 잔치·대회 장소로도 애용
"고을의 어진 선비들과 좋은 정자서 친분 나눠 가슴 트이며 맑아지고 시비를 터득한 것 같네"

오횡묵의 행적을 보면 거의 쉬는 여가가 없었다. 하루에 100리 넘게 길 위에 있기도 하였고 자정 전후 해시(亥時)에 횃불을 들고 돌아오기도 하였다. 어떤 때는 비를 쫄딱 맞기도 하였고 새벽에 잠자리에 들어 옷을 입은 채로 한두 시간밖에 못 자고 일어나기도 하였다. 바깥에서 업무를 보다 기운이 빠져 뒷산에 숨어 잠깐 쉬는 등 지쳐 떨어지거나 아파서 옴짝달싹할 수 없거나 땀이 비 오듯 쏟아지거나 하는 표현도 곳곳에서 튀어나온다.

이런 오횡묵에게 무진정은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와 같았고 사막에서 만나는 오아시스와도 같았다. 업무에 바삐 쫓기는 틈틈이 몸과 마음을 두루 편안하게 하면서 쉬고 즐길 수 있는 정자였다. 산도 좋고 물도 좋고 사람도 좋은 그런 자리였다.

◇부임하는 날 보았던 무진정

부임하는 1889년 4월 21일 오횡묵에게 처음 선을 보인 무진정은 날렵하고 그윽하였다. "부자쌍절각 아래에 못이 있고, 못 가에 조그만 정자가 날아갈 듯 서 있는데 무진정(無盡亭)이라 한다. 집의(執義) 벼슬을 지낸 조삼(趙參) 선생이 창건했는데 초목이 깊이 우거졌고 대숲이 맑고 기이하였으며 기암괴석이 장관을 이루었다."

그 앞에는 삼반관속들이 모두 나와 있었다. 신임 군수를 공손하게 맞이하는 공식 부임 행차가 시작되는 첫머리였다. 관속들은 앞장서서 군물을 동원해 풍악을 울리며 지위·역할에 따라 대열을 이뤄 함안읍성까지 행진했다.

◇주세붕의 눈에 비친 최초 모습

<함안총쇄록>을 보면 오횡묵은 1889년 5월 21일 무진정에 처음 올랐다. 읍내 들판(邑坪)에 나가 열심히 농사지으라는 권농을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둘러 보니 모내기는 순조로웠다. "시냇물이 불어 넘치고 강가는 범람하여 모내기는 단지 사람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만 남아 있다." 하지만 보리농사는 반반이었다. "골짜기는 이미 수확을 마쳤으나 물가의 거두지 못한 보리는 모두 물에 잠겨 영영 버리게 되었다." 한편 걱정스럽고 한편 기쁜 국면이었다.

무진정에 올라서는 풍기군수 주세붕(1495~1554년)이 지은 기문(記文)부터 먼저 읽었다. 정자 주인의 부탁을 받고 1542년 6월 지은 무진정기(無盡亭記)였다. 거기에는 350년 전 처음 지은 당시 모습이 담겨 있었다.

"모두 두 채인데 서쪽은 온돌방을 하고 동쪽과 북쪽은 모두 창을 내었다. 창 밖에는 단(壇)이 있는데 옥돌로 만든 바둑판(玉局) 같았다. 아래 푸른 절벽에는 대천(大川=함안천)이 남쪽에서 흘러든다. 고여 있으면 밝은 거울 같고 (정자를) 둘러싸면 옥띠 같고 소리는 쟁그랑거리는 패옥 같다. 절벽을 돌아 북쪽으로 흘러 풍탄(楓灘)으로 들어간다."

풍경은 어떠했을까? "시내 바깥에 1000그루 정도 벽오동이 있다. 동쪽으로 소나무와 전나무가 10리에 걸쳐 울창하다. 남쪽으로 하늘을 받치는 우뚝한 산이 있는데 그 사이에는 조그만 집도 없다. 북쪽으로 눈길이 천리까지 닿는 큰 들판은 보리가 패면 푸른 물결이 하늘에 하늘거리고 곡식이 익으면 누런 구름이 땅을 덮는다."

◇오횡묵이 본 달라진 무진정

읽고 나서 오횡묵은 이렇게 말했다. "정자의 형편은 대체로 앞사람의 기록에 다 들어 있다. 다만 연대가 오래되었으니 지금 보는 바와 같을 수는 없다."

먼저 앞쪽 연못을 짚었다. "네모난 못의 남쪽 반은 메워서 밭이랑 모양을 이루었다. 대개 들으니 처음에는 못이 둥글고 널찍했다. 조씨들이 부강해지고 인재를 배출하여 온 고을을 짓누르게 되자 사람들이 모두 걱정하여 술사(術士)들의 말을 따라 지역 양반들이 흙을 져다 부어 못을 메웠다. 그 뒤로는 조씨들이 많이 쇠퇴하고 부진해졌다는데 또한 이상한 일이다."

다음은 주변 조경이다. "둑 위의 나무들과 정자 뒤 세 그루 회화나무(槐)가 오래되고 무성하여 그 전성기가 떠오르는데 전성기는 지금 보는 바와 같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백일홍(배롱나무) 몇십 그루가 정자 앞에 나란히 심겨 있고 푸른 대가 숲을 이루어 정자 뒤에 총총히 서 있다. 모두 오래된 모습은 없으니 아마도 중간에 심은 것 같다." 모두 기문에는 나오지 않은 것들이다.

정자가 놓인 터도 살폈다. 이 또한 기문에 언급되어 있지 않다. "우뚝하여 거북 등 모양인데 돌 등뼈가 터져서 흙이 그 위를 덮고 있다. 사방 모퉁이가 깎아내려져 있는데 암반이 매우 크고 단단하다."

마지막은 주변 풍경이다. "남쪽 끝에는 읍내 사는 사람들의 집에서 연기가 빽빽하게 둘러 있고 북쪽으로는 큰 들판과 통하여 벼와 보리가 질펀하게 이어져 있고 아울러 산을 두르며 물에 잇닿아 있어서 다만 바람과 아지랑이가 끝없이 하늘거릴 뿐이다."

시도 한 수 읊었는데 몇 줄 옮기면 이렇다. "주인은 오는 일이 적고 나그네는 많이 오니/ 지팡이 하나 짚고 동남쪽 난간에 서성인다네/ 섬돌을 두른 대숲은 푸른 피리를 부는 듯/ 연못 가득 연잎은 푸른 동전을 포갠 듯/ 바람 받으며 한 번 휘파람 부니 가슴이 시원하네."

▲ 주세붕은 기문에서 무진정이 두 채라 하였지만 지금은 이처럼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 크기 한 채가 전부다./김훤주 기자
▲ 주세붕은 기문에서 무진정이 두 채라 하였지만 지금은 이처럼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 크기 한 채가 전부다./김훤주 기자

◇무진정에서 보낸 즐거운 한때

1890년 3월 2일은 절기가 곡우(穀雨)였다. 곡우가 되면 얼었던 땅도 많이 풀리고 겨우내 말랐던 나무도 물을 한껏 빨아올린다. 풀과 나무는 새롭게 색깔을 갈아입고 덩달아 봄빛도 한창 좋아지게 되는 것이다.

오횡묵은 아침에 성산산성에 올랐다가 점심 무렵 무진정을 찾았다. "들풀이 푸릇푸릇 부드러웠고 제방의 버드나무는 약간 누랬다. 화사한 바람과 고운 햇살이 산 경치를 더욱 화사하게 만들었다. 옅은 아지랑이와 가벼운 연기가 사람 마음을 흔들어놓아 시를 지었지만 완성하지 못했다."

점심 자리는 시를 짓던 도중에 마련되었다. "주방 아전(廚吏)에게 술과 안주를 내라고 명령했다. 그러는 사이에 정자 주인 조씨 네 사람도 술과 안주를 가져왔다. 자리를 함께하여 먹었고 먹기를 마치니 시가 이루어졌다."

"한가한 날 높이 올라 푸른 산색 마주하네/꽃은 봄을 시기하여 고운 웃음을 보내고/나비는 바람이 찰까 두려워 따뜻한 데로 날아가네/골짜기 안개 흩어져 아침에 비단을 이루고/문간의 버들 늘어져 석양에 이르렀네."

이듬해는 곡우가 3월 12일이었다. 마찬가지로 오횡묵은 무진정을 찾았는데 이번에는 함께한 일행이 좀 색달랐다. 아들인 학선과 지인인 석성과 함께 가면서 기생 금란(錦蘭)·채봉(彩鳳)을 끼워 넣은 것이다.

함안에는 기생이 없었다. 1890년 4월 15일 밀양에 겸관(兼官)이 되어 갔을 때 수청 기생들이 나와 인사를 올린 적이 있다. 이날 오횡묵은 '함안에는 본래 기생이 없어서 풍류를 즐기는 마당에 흥을 돋우는 일은 절대 볼 수 없다'고 적었다. 그렇다면 이 기생들은 어디에서 왔을까?

다른 일행은 "온종일 마음을 풀었"지만 오횡묵은 "오로지(惟)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돌아다니며 꽃을 감상하였다." <함안총쇄록>을 보면 오횡묵이 평소 기생을 좋아하기는 했어도 가까이하지는 않았다. 이날도 그랬던 모양이다. 더불어 기생이 왜 셋이 아니고 둘인지도 좀은 짐작이 된다.

◇권학을 위한 잔치를 무진정에서

선비들을 위한 시회(詩會) 자리로도 활용되었다. 요즘으로 치면 경로잔치 성격도 더해진 마당이었다. "마을의 경험 많은 노인들이 마음을 후련하고 명랑하게 탁 터놓기 위하여 노인연(老人宴·국가 차원에서 80살 또는 90살 넘은 이들을 모시려고 벌였던 잔치)을 본보기로 삼아 한 번 모두 모여 술 마시고 읊조리자는 취지"(1890.3.16.)였다.

"모든 훈장(訓長)들에게 봄이 무르익은 3월 27일에 무진정으로 모이라고 일렀다. '하루 단란하게 지내면서 마음속 깊은 정을 넉넉히 풀어놓고 실컷 봄술에 취하며 …관민(官民)이 모두 하루를 즐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3월 27일의 잔치는 아침 일찍 오횡묵이 남여(藍輿)를 타고 나가 숲 속에 장막을 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선비들이 와서 명함을 올리고 나가 모였는데 오시(午時)가 되지 않았는데도 300명가량 되었다.

"선비들에게 점심값(午料)으로 30문씩 주었는데 청포 입은 젊은이와 머리 허연 늙은 선비, 붉고 푸르게 입은 아이들이 꽃나무 그늘 아래에 무리 지어 모여 눈썹을 찌푸리며 사색하거나 무릎을 치며 읊조리는데 시는 완성하는 대로 예리소(禮吏所)에 갖다 바쳤다."

"미각(未刻)이 되자 본읍의 먼 데 사는 선비들과 이웃 고을의 문사(文士)들까지 소식을 듣고 뒤늦게 왔는데 매우 많았다. 역시 모두 점심값을 주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혼자 여러 사람을 대하는 수고를 견디지 못하여 잠시 정자 뒤편 소나무 우거진 한적한 데로 물러났다."

이날은 흥겹게 어울려 노는 것이 원님의 임무였다. 사람 마음을 얻는 일이 거기에 있었다. "땅거미가 비끼며 새소리가 드물어지니 바야흐로 사람들이 목이 마를 때였다. 노주(酒) 네 동이와 북어 안주를 모인 자리에 풀고는 술잔이 돌 때 음악을 연주하여 즐겁게 하였다. '사람은 많고 먹을 것은 적어 아쉽지만 …한 잔 술을 어떻게 마시느냐에 달려 있다'고 하였다."

"조금 있으니 쇠잔한 노을이 붉은 빛을 거두고 먼 곳은 연기가 푸른 빛을 지우고 있었다. 지인 둘과 더불어 시냇가로 가서 바람을 쐬며 관동에게 술 한 병을 다시 사오게 하였다. 술이 세 번 돌아감에 함께 시를 지었다."

오횡묵은 이날 무척 기분이 좋았다. "고을의 어진 선비들과 종일 좋은 숲과 정자에서 수작하여 기쁘고 즐겁게 친분을 나눌 수 있어서 나는 눈썹이 펴지고 가슴이 탁 트이며 맑아져 환하게 시비(是非)를 터득한 것 같다."

◇군수 떠나가는 전별연도 무진정

1893년 2월 3일 오횡묵은 고성군수로 전근 발령을 받았음을 알게 되었다. 보통 2년 안팎이면 임기를 채우고 떠나는데 오횡묵은 고을 사람들이 사정하는 바람에 임금이 한 번 더 하라 하여 3년 10개월 함안에 머물렀다.

2월 21일 고을의 부로(父老)와 문사들이 전별을 위하여 수백 명이 모였다. 읍성에서는 다 수용할 수가 없어서 무진정에 자리를 마련하였다. "아침 늦게 내가 지인들과 더불어 나가니 젊은 선비와 백발노인이 정자를 둘러싸서 가득하였다. 술이 반이나 되자 시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모두 운자(韻字)를 말해주어 대략 펴서 이별의 정을 올리게 해 주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오횡묵은 그러지 말자고 하였다. 시를 잘 짓지 못하는 사람을 위한 배려였다. '시를 잘하는 사람도 있고 못하는 사람도 있으니 반드시 시령(詩令)으로 곤란하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또 시담(詩談)으로 회포를 푸는 데 도움이 되기보다는 시가 없이 자기 감정조차 잊어버리는 것이 낫다.' 하지만 "포시(哺時)에 대여섯 시인들이 스스로 운을 뽑아 나에게 보이거늘 운자를 이미 뽑은지라 약속을 깰 수밖에 없었다."

◇봇짐장수 대회도 무진정에서

무진정은 이처럼 고을 원님과 양반들이 독차지한 것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그렇지만은 않았다. 1891년 4월 22일 자 <함안총쇄록>을 보면 "무진정에서 보상(椺商)대회가 열렸다. 노래와 술을 즐겼는데 모인 것이 1000명 남짓이었다. 낮에 음식물을 갖추어 와서 바쳤다."

보상은 봇짐장수라 하는데 보자기에 싸서 이거나 질빵에 걸머지고 다녔으며 이와 달리 등짐장수라 하는 부상은 물건을 지게에 짊어지고 다녔다. 보상과 부상을 묶어 보부상(褓負商)이라 하는데 이들은 전국과 지역에 상단 조직을 단단하게 갖추고 있었다. 1899년 상무사(商務社)라는 이름을 갖추게 되는데 이는 상공회의소의 전신으로 취급된다.

<함안총쇄록>에는 이들 보부상이 나쁘게 적혀 있다. 오횡묵은 1889년 6월 29일 고치고 바로잡아야 할 서른여섯 항목에 이르는 '교혁절목(矯革節目)'을 발표했는데 서른네 번째에 보부상이 나온다. "시골 마을에 작폐를 하여 연악(燕樂)을 베풀고 돈을 거두니 평민들의 걱정이 없지 않다. 만일 이렇게 작폐를 하면 동네에서 결박하여 잡아올려 훗날의 폐단을 막아야 한다."

▲ 무진정 못둑에 서 있는 왕버들. 지금은 열 그루도 남아 있지 않지만 옛날에는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김훤주 기자
▲ 무진정 못둑에 서 있는 왕버들. 지금은 열 그루도 남아 있지 않지만 옛날에는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김훤주 기자

◇무진정은 무진정 이수정은 이수정

<함안총쇄록>에는 무진정 말고 여러 이수정이 나온다. 한자는 다르지만 실물 이수정은 하나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무진정을 두고 이수정이라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함안총쇄록>을 보면 무진정과 이수정은 별도로 존재한 다른 정자였다. 이수정은 관아에서 5리에 하나씩 두었던 관설(官設)에 가깝고 그 바로 옆 무진정은 함안 조씨 집안에서 지은 사설(私設)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이수정은 없어졌고 무진정은 살아남았는데 그로부터 혼동이 시작되었으리라 짐작된다.

"이수정(二水亭)이 있는데 옆에 조씨 부자쌍절각(父子雙絶閣)이 있다. 아비는 충신 조계선(趙繼先)이고 아들은 효자 조준남(趙俊男)이다.(사실은 거꾸로) 곁에는 충노대갑지비(忠奴大甲之碑)라고 새긴 작은 비석이 있다. 대강 들으니 임진왜란(사실은 1627년 정묘호란) 때 주인(조계선)이 싸우다 죽자 대갑이 돌아와 널리 부고를 하였다고 한다. 비각 아래에 못이 있고, 못 가에 조그만 정자가 날아갈 듯 서 있는데 무진정이라 한다."(1889. 4. 21.)

<함안총쇄록>에는 이수정도 여러 번 나온다. 오횡묵이 부임 이튿날 읽은 <군지>에 "이수정(二水亭)이 관아 북쪽 5리에 있다"고 되어 있었다. 또 1889년 5월 6일에도 "일수정(一藪亭)은 말산동에 있고 이수정(二藪亭)은 괴항동에 있고 삼수정(三藪亭)은 객사 앞에 있다"고 언급되어 있다.

1891년 5월 2일에도 이수정이 등장한다. 오횡묵이 부임 2년을 넘긴 시점에 다른 데로 발령이 나리라 짐작하고 서울 본가로 향하는 장면이다. "길을 떠나 이수정(二藪亭)에 이르니 삼반관속들이 아울러 와서 송별하였으며 조씨들 수십 명은 길을 막고 남아 있어 달라고 요청했다."

1892년 9월 25일 중전 생일을 맞아 축하행사를 베풀 때도 나온다. "사각에 이수정(二樹亭)에 나가 삼반관속과 고을 유생 280명 남짓에게 급료로 3전씩 주었고 구경나온 어린아이 200명 남짓에게도 5문씩 주었다. 나머지 피곤하고 병든 사람들로 마당에서 보고 있는 이들에게도 일절 베풀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정자임이 분명하지만 오횡묵이 군수를 하던 당시에도 둘을 혼동하는 기미가 뚜렷하였다. 1891년 3월 12일 무진정에서 놀았는데도 지은 시에서는 이수정이라 했다. "병든 사내(病夫)가 중향관(함안 관아의 책실)에서 심취(心醉)하니/ 나그네의 시가 이수정(二樹亭)에서 이루어지네."

앞서 1890년 3월 27일 시회를 베푼 자리가 무진정이었으나 시를 책으로 묶을 때는 이수를 이름에 넣었다. "관아로 돌아와 시를 모두 모아 하나로 편집하여 '이수시총(二藪詩叢)'이라 하였는데 무릇 300수 남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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