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령화 시대 대비하는 일본 2000년 인지증으로 용어 바꿔
노인 인구 29% 달하는 우지시 지자체·기관·단체 자발 참여해
지역 네트워크 레몬에이드 운영 자신의 일처럼 배려·공생 모색

일본은 2012년 '치매 대책 추진 5년 계획'에서 시작, 2015년 '신(新) 오렌지플랜'을 마련해 초고령화 시대 치매 문제에 대비해왔다. 이보다 앞서 2000년부터 개호보험제도를 시행하면서 '이상한 사람', '사회로부터 격리해야 할 사람'이라는 차별적 의미를 담은 치매(일본식으로 '치호')라는 말 대신 '인지증(認知症)'으로 고쳐 부르기 시작했다. 노인인구 비율이 늘어나는 현실을 인정하고, 고령화 시대에 벌어질 수 있는 다양한 문제 가운데 하나인 치매(인지증)를 사회현상으로 받아들인 셈이다.

일본 치매정책의 근간이 되는 '신 오렌지플랜'은 요양이나 의료가 중심이 되는 질병이 아니라 사회적 현상으로 치매를 받아들이고 이해를 넓히는 과정에 주력해왔다. 현재까지 치매를 완치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정부나 지자체에서 할 수 있는 실질적인 대책은 조기 검진 등을 통해 경증환자가 중증으로 진행하는 것을 막고, 발병 시점도 늦추는 '예방' 차원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환경을 조성하는 '공생'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방향으로 진화해왔다.

이 같은 생각을 지역 단위에서 실천해온 일본 우지(宇治)시를 찾아 '인지증(치매) 환자가 살기 편한 마을'을 선언한 배경과 과정, 의미를 들어봤다.

▲ 일본 우지시에서 운영하는 '인지증 카페'는 인지증 환자, 가족이 지역사회와 소통하는 공간으로 운영하고 있다. /우지시
▲ 일본 우지시에서 운영하는 '인지증 카페'는 인지증 환자, 가족이 지역사회와 소통하는 공간으로 운영하고 있다. /우지시

◇자발적 참여의 힘은 '배려'에서 시작 = 일본 교토 인근에 있는 우지시는 인구 18만 명 규모 도시로 65세 이상 노인인구 비율은 28.75%다. 2015년 일본에서 처음으로 '인지증(치매) 환자가 살기 편한 마을'을 선포한 우지시는 적극적인 인지증 관련 정책을 펼치며 지역사회가 함께 고령화 시대를 대비하고 있다.

우지시는 일본 정부에서 신 오렌지플랜을 시행하기 전인 2001년부터 인지증예방교실을 운영하는 등 인지증 문제에 대처해왔다.

초기에는 예방 중심의 교육과 강연 등을 중심으로 진행했지만 2013년 정부 시범사업으로 정신병원 2곳에 인지증종합상담지원사무소 운영을 시작하면서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하고 '인지증 환자가 살기 편한 마을'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현재 우지시가 추진하는 인지증 정책은 '레몬'으로 상징된다. 일본 정부의 신오렌지플랜에서 '오렌지'는 중증 인지증 환자를 의미하는 색이다. 우지시는 오렌지보다 한 단계 앞선 경증 인지증 환자를 '레몬'으로 부르며 시가 추진하는 정책의 상징으로 삼아 지역주민과 함께 인지증 환자와 더불어 사는 일에 집중하고 있다. 이른바 '레몬에이드(Lemon-Aid)'는 지역사회 인지증대응 종합운영시스템을 일컫는 표현으로, 경증 인지증 환자를 상징하는 레몬에 '도움을 준다'는 의미를 담은 에이드(Aid)를 조합한 것이다. 현재 지자체뿐만 아니라 은행·교통·택배·농업·약국·대학·식당·사회단체 등 다양한 분야에 걸친 56개 기관·단체·기업 등이 레몬에이드라는 이름으로 '인지증 얼라이언스(연합)'를 구축하고 있다.

▲ 일본 우지시에서 인지증 문제에 대처하는 지역사회 네트워크 '레몬에이드'는 경증 인지증 환자를 상징하는 레몬(Lemon)과 '돕다'(Aid)는 의미를 더한 표현이다. /우지시
▲ 일본 우지시에서 인지증 문제에 대처하는 지역사회 네트워크 '레몬에이드'는 경증 인지증 환자를 상징하는 레몬(Lemon)과 '돕다'(Aid)는 의미를 더한 표현이다. /우지시

인지증 환자가 불편 없이 일상을 누릴 수 있도록 생활밀착형 서비스를 제공하는 '레몬에이드'는 자발성을 기초로 한다. 참여기관 또는 단체, 기업은 구성원을 대상으로 인지증 환자 특성과 대처 요령 등을 스스로 배운다. 예를 들어 은행에 인지증 환자가 찾아 통장을 만들려고 할 때 이를 어떻게 도울지, 배회하는 인지증 환자를 발견했을 때 경찰 또는 병원과 연계하는 방법 등을 자체 교육을 통해 익히는 것이다. 레몬에이드에 참여한 지역 마트는 직원 대부분 인지증 서포터 양성 강좌를 듣고 인지증 환자가 물건을 살 때 계산을 도와주는 등 지역사회 구성원 모두 자기 자리에서 실천할 수 있는 작은 일부터 시작한다.

하라 마유미(43) 개호예방추진계장은 "인지증은 누구나 걸릴 수 있는 질병이라는 생각으로 환자와 가족 모두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도록 하는 마을을 만드는 일이 우지시가 추진해온 인지증 정책의 핵심"이라며 "레몬에이드는 인지증을 '자신의 일'로 이해하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하나둘 모여 시작했다"고 말했다.

▲ 인지증 환자 스스로 강사로 나서는 것은 '격리'가 아닌 '공생'으로 인지증 대책에서 사회 참여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우지시
▲ 인지증 환자 스스로 강사로 나서는 것은 '격리'가 아닌 '공생'으로 인지증 대책에서 사회 참여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우지시

◇격리 아닌 공생으로 사회적 비용 감소 = 처음부터 우지시가 이 같은 성과를 거둔 것은 아니다. 2001년부터 운영한 인지증예방교실과 같은 교육·홍보 프로그램이 초등학교에서부터 시작해 지역사회 전체로 확대되면서 점차 시민 의식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인지증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대신 올바른 인식을 심어주는 일은 인지증 환자가 살기 편한 마을을 만드는 밑바탕이 됐다.

지금은 일본 전역으로 확산했지만 '인지증 카페'는 우지시가 지역사회 인식을 바꾸고자 노력해온 결과물이다. 실제 레몬에이드에 참여한 카페나 식당에서 이벤트성으로 인지증 환자가 음식을 주문받아 만들고 손님에게 제공하기도 하지만 카페는 인지증 환자와 가족, 시민사회가 소통하며 정보를 나누는 공간으로 운영하고 있다.

우지시는 카페 운영을 위해 지역사회복지법인과 위탁계약을 맺고 인지증관리코디네이터를 배치, 7개 권역별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주로 분기마다 열리는 카페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고 강연과 공연, 그리고 인지증 환자·가족·시민이 서로 어려움을 나누는 시간으로 진행한다. 이 과정에서 인지증 환자가 스스로 강연자로 나서 자기 경험담을 들려주며 인지증 극복 의지를 전하기도 한다. 코디네이터는 이 같은 카페 운영을 준비하고, 사후 관리하는 과정 전반을 담당한다.

이 밖에도 레몬에이드에 참여한 지역대학은 임상심리학연구소에서 인지증 환자 사례를 연구해 다양한 프로그램 개발을 위한 이론적 뒷받침을 하고 있다.

무엇보다 사회와 격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참여를 통해 병의 진행을 늦추고 환자 스스로 일상을 즐기며 병을 이겨내는 일에 집중하고 있다. 녹차로 유명한 우지시는 레몬에이드 참여 농가와 함께 다양한 농업체험활동을 펼치고,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인지증 환자가 강사로 직접 나서 이해를 넓히는 계기를 마련하고 있다. 경증으로 시작한 인지증이 중증으로 넘어가기 전 환자 스스로 사회로부터 고립되는 현상을 막는 일은 의료·복지에 들어가는 사회적 비용을 줄이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우지시가 '인지증(치매) 환자가 살기 편한 마을'을 선포하며 밝힌 선언문에는 "인지증 환자나 그 가족 목소리를 정책에 반영해 인지증 환자 눈높이에 맞춘 지원체제를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다시 말해 인지증 환자가 다른 이와 다르지 않은 일상을 누릴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는 일이야말로 지역사회 역할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한 것이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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