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단한 삶·노동조건 여실히 담겨
그만의 승객 사랑법도 보여 '뭉클'

아침저녁으로 버스를 타던 시절을 돌이켜보면 좋은 기억이 별로 없다. 산복도로를 지나 자리했던 학교 앞에 정차하는 버스는 '가뭄에 콩 나듯' 적었다. 운 좋게 타더라도 콩나물시루 같은 버스 안에서 한 손엔 손잡이를 한 손엔 도시락통을 부여잡고 관성의 법칙, 가속도의 법칙, 작용반작용의 법칙 등을 몸소 체험했었다. 서 있는 사람 어쩌라고 저렇게 운전을 험하게 해댈까? 버스기사 뒤통수를 노려본 적이 많다.

어디 버스기사 뒤통수만 째려봤을까. 무릎 밑으로 훌쩍 내려갔던 교복 치마를 휘날리며 숨이 턱까지 차오르도록 버스를 향해 내달려도 마치 약을 올리기라도 하듯 늘 코앞에서 버스는 '부릉' 시원하게 떠난다. 민망함과 원망을 한껏 담아 버스 뒤꽁무니도 양쪽 눈이 찢어져라 쳐다보았다.

▲ <나는 그냥 버스기사입니다> 허혁 지음
▲ <나는 그냥 버스기사입니다> 허혁 지음

전주 시내버스운전기사 허혁이 지은 <나는 그냥 버스기사입니다>는 오랜 세월,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친구와 마주 앉은 채 그의 이야기에 울고 웃고 때론 격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시간을 선물한다.

"나는∼"으로 시작하는 고백, 그리고 노동과 경험에서 나오는 글에는 강력한 힘이 있다. 20년 가까이 조그마한 가구점을 운영하다 관광버스로 잠시 경력을 쌓고 시내버스 입사 5년 차를 지나는 저자는 격일로 하루 18시간 운전대를 잡는 고단한 행군을 하는 동안 다양한 자신을 마주했고, 다양한 사람을 만났다. 그리고 버스 운전석에 앉아 바라본 세상 사는 이야기를 기록했다.

저자의 말을 빌리면 그에게 시내버스는 대학이다. "삶의 목적이 인격 성숙이라면 전주 시내버스만 한 대학도 드물 것"이라며 "하루 열여덟 시간의 악마적인 노동은 항상 나를 깨어있게 한다. 그 어떤 곳에도 환상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버스에 시동이 걸리면 천당과 지옥을 수시로 넘나든다. 세상에서 가장 착한 기사였다가 한순간에 가장 비열한 기사가 되고 마는 고백부터 지금도 화해하지 못한 아버지의 이야기를 담았다. 열심히 살아야 겨우 살아지는 고단한 삶이 녹아 있고, 버스운전기사의 내밀한 속사정도 드러낸다.

이 책의 특이점은 누군가의 직업으로 깊숙이 들어가 그 마음은 헤아려 보고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왜 버스가 늦게 오는지, 왜 기사는 물어봐도 대답도 잘 안 해주는지, 왜 선글라스까지 쓰고 인상을 팍팍 쓰고 있는지, 왜 두드려도 문을 열어주지 않는지, 왜 모두 자리를 찾아 앉을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는지…. 그토록 뒤통수를 쏘아댔던 운전기사들의 마음을 이해할 때쯤 이 책의 종점에 도달한다. 모두의 삶에는 나름의 이유와 방식이 있다. 세상에는 수만 가지의 직업이 있고, 그 속에는 늘 우리가 잊고 있던 나와 같은 사람이 있다.

<나는 그냥 버스기사입니다>는 기사와 승객, 그리고 그 사이의 버스라는 매개를 통해 자신에게 그리고 서로에게 조금 더 다정해질 수 있는 노선도를 그려나간다.

"내리고 싶은 자 편히 내려주고, 타고 싶은 자 얼른 태워주고 그리고도 남는 시간은 운전에만 집중할 것"은 인사조차 받지 않는 버스기사의 숨은 사랑법이다. (3부 '운전 중인 버스기사에게 말을 건네면 안 되는 이유' 중에서)

수오서재 펴냄. 233쪽. 1만 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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