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초기 안채 중심 생활서 중기 이후 별도공간 확대…양식 변화 대표사례 함양에

이번 주는 생활공간을 살펴보고자 한다. 일단 양반집이다. 현재 남아 있는 목조건물은 대부분 임진왜란 이후의 것들이다. 고려말 몽고의 침입, 임진왜란 등 큰 전란이 겹치면서 임진왜란 이전에 만들어진 목조건물은 얼마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고등학교 국사시간에 우리는 안동 봉정사 극락전, 부석사 무량수전을 배운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고려시대 목조건축물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런 건물들은 공적인 공간인데 일상생활이 벌어지는 집은 상황이 더 안좋다. 한국전쟁과 70년대부터 집중된 주거환경 개량사업으로 남아 있는 집들은 더욱 적을 수밖에 없다. 특히 일제 강점기 말기와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기간은 지주와 농민들 계급 대립의 장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마을사람들에게 인심을 잃은 가문들과 집은 쉽게 사라져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지금 살아남은 고택과 그 종손들은 오랜 기간 주민들과 조화롭게 공존한 명문가일 가능성이 높다.

◇공간의 구성과 변화

집을 구성하기 위한 기본요소를 살펴보자. 일단 담장으로 공간을 나눈다. 그리고 외부와 내부를 이어주는 출입문이 필요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거주하는 아파트는 문열고 들어가면 바로 생활공간이 나오지만 한옥에서는 마당이 나오고 그 마당을 지나 건물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한옥은 이 공간을 만드는 과정이라고도 한다. 한폭의 동양화와도 같다. 모든 캔버스를 색칠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들만 배치해서 전체를 만들어내는 모습이다.

아주 기본적인 집의 모습을 생각해 보면 조선 초기에는 담장 안에 하나의 건물이 있었을 것이다. 하나의 지붕 아래 여름을 나기 위한 마루도 있고 겨울을 나기 위한 방도 있었다. 물론 마루는 더위만을 식히는 곳은 아니다. 6간 대청의 예에서 말했듯이 집안의 중요한 일을 하는 곳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방에 불을 지피면서 음식도 만들 수 있는 부엌이 있었다. 통상 이 건물을 안채라고 불렀다.

물론 담으로 둘러싸인 하나의 구역 내에 건물 한 동만 있으라는 법은 없다. 사회적, 경제적 필요에 의해 여러 동의 건물을 만들 수 있다. 그래서 세종대부터 신분에 따라 집을 짓는 기준을 만들었다. 우선 규모를 보면 공주는 50칸, 대군은 60칸, 이품 이상은 40칸, 삼품 이하는 30칸, 서인은 10칸을 넘으면 안 된다. 칸이 방의 수는 아니다. 기둥과 기둥 사이가 한 칸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일반적인 정면 3칸, 측면 3칸 집은 9칸 집이 된다. 서민은 딱 이정도 집만 지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사용하는 석재도 다듬어 쓸 수 없었다. 유일한 예외는 주춧돌에만 허락되었다. 당연히 단청도 사용할 수 없었다.

이런 구조가 조선시대 중기를 넘어가면서 변하기 시작한다. 조선 전기에는 대문 한쪽 혹은 안채의 가장 바깥쪽에 있던 사랑이 독립된 공간으로 확대된다. 특히 양반집 기준으로 안채에서 바깥쪽으로 사랑채가 갈라져 나온다. 그래서 조선 후기 양반가들은 대부분 문을 넘어서면 사랑채로 들어가게 된다. 이런 모습을 조선 후기에 남녀의 구분이 강화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단순히 남녀유별의 유교이념을 실현하기 위해서 이런 공간을 만들기에는 지나치게 많은 자원이 필요한 행동이다. 그리고 정작 '가례(家禮)'에는 나오지도 않는 내용이다. 경복궁을 처음 지을 때도 사랑채와 안채의 구분은 없었다. 왕과 왕비를 위한 생활공간은 강령전 하나밖에 없었다.

오히려 이 현상은 조선시대 중기로 들어서면서 변화된 사회적 상황에 따라 발생한 것일 수도 있다. 이 시기 지방에서는 사림세력이 등장하면서 실권을 잡아나간다. 사림(士林)은 글자 그대로 선비들의 숲이다. 조선 전기 개국공신들을 중심으로 한 훈구세력들에 대항해 새롭게 등장한 이들은 성리학의 본원을 앞세워 새로운 질서를 주장했다. 그들은 이전 중앙집권적 통치보다는 향촌자치를 선호하면서 사설 교육기관인 서원을 만들고 자치규약인 향약을 따랐다. 경제적으로도 자작농보다는 지주제를 선호하면서 지방을 장악했다.

이렇게 등장한 새 흐름에 의해 양반과 평민이 세습적인 관계로 갈라졌고 양반들은 그들끼리 더욱 끈끈한 관계를 이어나가게 된다. 이를 위한 교류의 장소가 필요했던 것도 독립된 사랑채가 등장하게 된 주된 원인인 것으로 보인다.

▲ 일두 정여창 후손이 사는 일두고택 사랑채 모습. 총 16채 일두고택 건물 중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세 채 중 하나다. /문화재청
▲ 일두 정여창 후손이 사는 일두고택 사랑채 모습. 총 16채 일두고택 건물 중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세 채 중 하나다. /문화재청

◇일두 정여창

이제 이런 상황이 어떻게 실생활에 적용되는지 살펴보자. 텍스트는 함양에 있는 일두고택(국가민속문화재 제186호)이다. 일두고택은 성종대의 대학자 일두 정여창(1450~1504) 선생의 후손이 사는 집이다. 일두 선생은 조선 5대 유학자 중의 한 분이다. 동방오현(東方五賢)이라고 하는데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을 이른다. 과거에 아홉 번 장원급제한 율곡 선생도 여기에 들지 못한다.

정여창 선생의 호 '일두'는 한 마리 좀벌레라는 말이다. 좀벌레 한 마리로 자신을 낮추면서 좀벌레가 오래오래 먹이를 갉아먹듯이 꾸준히 오래 학문을 하겠다는 의미이다. 김종직의 제자이다. 김종직은 조의제문을 지었고 그 제자 김일손이 이를 성종실록에 싣는다. 조의제문은 단종을 기리고 세조를 비난한 글이다. 훈구파의 이극돈이 연산군에게 이를 고한다. 실록을 유출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사림을 견제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것이다. 이로 인해 사람들에게 피바람이 불었다. 이 피바람이 조선시대 첫 사화인 무오사화이다. 여기에 연루되어 정여창 선생은 함경도로 귀양을 갔고 7년 만에 병사했다. 후손들은 시신을 함양으로 모셨는데 그 다음해 갑자사화가 일어났다. 연산군의 생모를 폐위시키고 사사(賜死)한 세력, 사림들에 대한 2차 공격이었다. 일두 선생은 이 일로 부관참시된다.

하지만 연산군이 폐위되고 중종은 일두 선생에게 정1품 우의정을 추증해 복권시킨다. 후학들은 고택 인근 남계서원에 일두 선생을 모셨다. 이후 명종은 남계서원에 사액한다.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에 이은 두 번째 사액서원이다. 고종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에도 남계서원은 살아남았다. 일두 선생의 힘이다.

◇일두고택

고택은 함양 개평마을에 있다. 기록에 의하면 일두 선생의 증조부인 정지의 선생이 처음 이곳으로 입향했다고 한다. 그리고 일두 선생 이후 지금까지 18대가 이어 내려온다. 입향조로부터 따지면 600년 이상 된 곳이다.

지금 남아 있는 고택은 일두 선생이 생존해 계시던 당시의 모습이 아니다. 안채는 1690년경에 지어진 것으로 보고 있으며 사랑채는 150년쯤 지난 1843년에 중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일두고택은 건립 당시 모습이 잘 남아 있어 조선시대 중기와 후기 양반가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좋은 사례가 되고 있다. 지금 고택에는 모두 16채의 건물이 남아 있다.

세부적인 모습은 다음 회에 살펴보기로 하고 전체 모습을 살펴보자. 우리가 살펴봤던 지식을 다시 생각해보면 고택 전체에서 어떤 건물들이 중요한지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힌트는 지붕의 모습이다. 잠깐 복습하자면 맞배지붕이 기본이고 지붕이 효율적으로 측면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우리나라에서 우진각지붕은 주로 건물의 정문이나 중요한 창고에 제한적으로 사용되었다. 궁극적으로 건물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는 팔작지붕을 사용했다. 16채의 건물 중 단 세 채만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사랑채, 안사랑채, 그리고 안채이다. 실제로도 일두고택의 사랑채는 할아버지, 안사랑채는 할머니, 안채는 아들부부가 이용했다고 한다. 집을 사용하는 주인공들이다.

또 하나 이 고택은 작년 한 케이블 티브이에서 방영한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촬영지였다. 여자 주인공 고애신(김태리 분)의 거처가 일두고택의 안사랑채이고, 할아버지 고사홍 대감(이호재 분)이 거처하는 곳이 사랑채였다.

정혼자였던 김희성(변요한 분)이 처음 찾아오는 담장길도 인상적이었고 남녀주인공이 처음 만나는 마당도 사랑채 앞마당이었다. 젊은 세대들은 이 드라마가 더 친숙하겠지만 그 전에도 대하드라마 <토지>의 최참판댁, "아프냐 나도 아프다"라는 대사로 화제를 일으켰던 <다모> 촬영지이기도 했다. 여러모로 일반인들과 인연을 쌓았던 친숙한 곳이다.

※이 기획은 LH 한국토지주택공사와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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