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에 붙들고 놓지 못하는 헛된 욕심
집착 버려야 진정한 자유를 얻는다

옛날 어떤 사람이 앞을 못 보는 사람을 업고 길을 간다. 가다 말고 나뭇가지 하나를 잡혀주면서 말했다. "나뭇가지를 잘 붙잡고 있거라. 잠깐 용변을 보고 와야겠다. 그런데 조심해라. 발밑은 천 길이고 독사가 우글거린다. 절대로 나뭇가지를 놓아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 옆 과실나무에서 과일을 한 개 따서 입에 물려주면서 "시장하면 이것을 따서 먹어라" 하고는 사라졌다.

조금 있으니 팔이 아파왔다. 너무 아파서 그 사람을 아무리 불러봐도 대답이 없다. 하루는 지나가던 사람이 "왜 나뭇가지에 매달려서 고생하는가? 어서 내려와라"고 하지만 소용이 없다. "아니 어떻게 내려온단 말이오? 발밑이 천길만길 낭떠러지로 독사가 우글거리는데. 그리고 이 맛있는 과일을 두고 어떻게 내려온단 말이오." 마침내 지나가던 사람은 "그러면 내려와서 따먹으면 될 것 아닌가"라고 했다. 한 손을 가만히 내려놨다. 한 손을 마저 놓으면 아주 내려오는 것인데 한 손을 놓지 못한다. 끝내 놓지 못하고 나무에 매달려 사는 사람이 되어버린다는 얘기다.

그런데 사실 그 땅과 나무의 거리는 손아귀의 거리다. 손아귀만 놓아버리면 대지 위의 대장부가 될 텐데 그것을 놓지 못한다. 어떤 집착을 놓는다고 하는 것은 진리의 대자유인(大自由人)이 될 수 있는 기본 길이다.

허공과 같은 큰 마음이 본래 내 마음이다. 허공은 내가 허공 같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우리 마음을 허공에 비유할 뿐. 우리들이 생각을 허공 같다고 하는 것처럼 허공 안에 우주가 있고, 그 안에 지구가 있고 지구 가운데 만물이 실려 있다. 허공이야말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큰 것이다. 무지광명(無知光明), 지각이 없는 밝음이다. 완전무결 순수한 진리의 본성을 말한다. 바로 청정을 일컫는다. 어쩌면 적멸(寂滅)인 고요한 경계인데 번뇌가 다 끊어진 참으로 즐거운 참으로 자유스러운 참으로 무한절대를 성취한 대자유를 완성한 상태를 적멸경계라 한다.

경전에 보면 허 씨 범지가 오신통을 갖춰서 꽃이 가득 핀 오동나무 두 그루를 뽑아 부처님께 문안을 드리러 갔다. 부처님께서 아무 말도 않고 "놓아라" 했다. 나무를 놓으라고 하는 줄 알고 오동나무꽃을 놓았다. 또 놓으라고 한다. 그래서 이쪽 오동나무꽃을 놓았다. 또 놓으라고 다그친다. 붓다는 "내가 그대에게 손에 들고 있는 그 꽃을 놓으라고 한 것이 아니다. 너의 육근의 감각을 놓고 육진을 놓고 육식을 놓아서 다시 놓을 것이 없는 데 가면 그때 네가 생사가 없는 곳으로 가는 것이다"고 했다. 붓다는 마침내 진리의 무한성인 화두(話頭) 즉 공안(公案)을 제시한 것이다. 과유불급의 유한성인 소탐대실에 탐착하면 모든 것을 순식간에 잃어버린다. 때론 삼라만상이 다 무너지고 변해가고 늙고 병들고 세상이 다 변해가고 어떤 것도 변치 않는 것은 없는데 참으로 변하지 않는 것과 상관없는 자, 죽지 않는 자, 불멸의 자, 진리 그 자체는 무엇인가?

오늘 휘영청 달 밝은 망운산에 별빛 무리 밝음을 더하니 굳이 기다리지 않아도 여명은 밝아 일출은 걱정 없이 대낮을 밝히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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