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형수(더불어민주당·양산 을) 국회의원 보좌관인 박영삼(51) 씨는 밀양 출신으로 초·중·고교를 모두 밀양에서 나왔다. 그는 "많이 사람이 그렇듯 특별히 의식하고 살지는 않아도 은연중 고향 생각을 하게 되고 어쩌다 밀양 이야기가 들려오면 먼저 관심을 갖고 보게 된다"고 했다.

 

태어나고 초·중·고 다닌 고향 밀양 떠나 서울로

Q. 밀양 출신으로 알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출생지 등 간략한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밀양시 단장면 미촌리 사촌에서 1968년에 태어났습니다. 단장면은 표충사가 유명한데, 제가 태어난 미촌리는 단장천이 흐르는 금곡마을에서 표충사 반대쪽으로 들어가는 남쪽 마을입니다. 제 또래가 2차 베이비부머 세대(1968~1974)의 시작이라고 하는데 주위에는 외려 막내가 많았어요. 저에게도 위로 형님과 누나 둘이 있구요. 여덟 살 되던 해 고향 마을 근처 안법국민학교에 입학한 뒤에 봄 소풍 끝나고 나서 바로 읍내로 가족들이 이사를 했습니다. 그 후 읍내에서 밀주국민학교, 밀성중, 밀양고를 다녔습니다. 학교 이름이 모두 밀양의 옛이름입니다. 1980년 이전까지 밀양 학생들은 공부를 좀 한다고 하면 주로 부산이나 마산, 진주 등지의 고교로 진학을 했는데 도시지역 평준화 이후에는 시험제도가 남아 있던 밀양고로 진학을 했습니다."

 

Q. 기억이 참 세세하네요. 다른 지역 학교로 갈 수도 있었다는 얘기 같네요. 밀양을 떠나 다른 곳에 자리 잡은 건 언제인지도 궁금합니다. 

"제가 고교 진학할 때 과학고 1기 입학생 모집이 있었는데 제가 다니던 중학교에서 다들 밀양고 입시 수석을 할 거라고 기대하고 과학고 진학을 말렸어요. 그런데 저는 사실 그때부터 입시공부는 등한히 했던 편이었고 결과적으로 수석은커녕 차석도 못했죠. 술 담배도 하고 친구들과 어울리고 창작과비평이나 문학과지성에서 나온 책들, 러시아문학사, 샤르트르, 장자 등 약간 아슬아슬한 것들을 좋아했어요. 고교 1학년 때 '미완성밀양학생문학회'라는 모임도 만들었습니다. 졸업할 때까지 4권의 동인지를 냈습니다. 돌아보면 치기 어린 내용에 모방 수준이었습니다. 겨울방학 때 밤늦도록 모눈종이에 마스터인쇄용 원고를 쓰다가 새벽에는 밀양역 철도수하물 알바를 해서 인쇄비를 마련했던 기억이 납니다. 문학회 모임을 가끔 영남루, 아랑각, 팔각정 등에서도 했는데 그 시절 추억이 밀양의 당시 모습과 함께 남아 있습니다. 고3 여름방학 때 병환으로 쓰러지신 아버지가 결국 돌아가시면서 저에게 냉정한 시간이 찾아왔습니다. 뒤늦게 부랴부랴 입시 준비를 해야 했는데 서울대를 목표로 했던 친구들을 쫓아가기엔 이미 늦었죠. 내신등급도 심각했구요. 대신 역사에 관심이 있었고 <분단시대의 역사인식>을 쓰신 고려대 강만길 교수님을 좋아했어요. 마산 출신이라는 것도 반가웠구요. 그래서 다른 고민할 것 없이 고려대 사학과를 선택했고 그게 밀양을 떠나 지금까지 서울 생활의 시작이 됐습니다."

 

Q. 원래 조상 대대로 밀양에서 살아왔던 건가요, 아니면 다른 곳에서 이주? 지금도 고향에 살고 있는 가족이 있나요?

"밀양에 계속 살았던 집안으로 알고 있습니다. 밀양 박가의 시조인 밀성대군 이래로 밀양에서만 살아왔다고 볼 수도 있는데, 그건 알 수가 없어요. 저희 할아버지가 남기신 가첩이 있는데 좁은 범위의 집안 족보예요. 거기에 있는 기록이나 선산의 조상 묘지로 봐서는 조선 초기부터 현재 밀양의 단장면에 살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지금 형제들 중에는 큰 누나만 밀양에서 살고 있고 어릴 적 고향에서 같이 명절 제사를 지내던 일가친척 중 밀양에 사는 분은 손으로 꼽습니다."

 

노동분야 전문가에서 서형수 국회의원 보좌관으로

 

Q. 보좌관 생활은 언제부터 했나요? 서형수 의원과 함께하게 된 계기, 배경 등이 궁금합니다.

"국회 보좌관은 서형수 의원실이 처음입니다. 서 의원이 20대 국회 전반기에 상임위가 환경노동위원회였기 때문에 노동문제를 좀 아는 보좌관을 찾다가 저와 인연이 닿았습니다. 서 의원이 한겨레신문사 사장 출신인데 제가 짧은 기간이나마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에 몸담았던 적이 있어서 어떤 사람인지 물어봤을 수는 있습니다."

 

Q. 원래는 오랜 기간 노동분야 전문가로 활동해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경력이 꽤 화려한데 간략한 소개를 부탁드리고, 어쩌다 노동 쪽에서 정치권으로 오게 된 건지 궁금합니다.

"대학 입학한 해가 1987년이고 졸업한 게 1993년입니다. 좀 단순하게 말하면 학생운동에서 노동조합운동으로 넘어가는 시기죠. 한때는 역사학자가 되는 것을 생각한 적도 있지만 개인적 소망 이런 건 좀 접자 했습니다. '현실에 기반하고 현실에 도움을 주는 리얼리스트가 되자'는 생각으로 노동조합과 노동운동 영역에서 일했습니다. 나름 자기 역할을 하는 연구소와 단체들이었습니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설립 때는 막내였고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설립은 전반을 기획하고 책임을 맡았습니다. 매일노동뉴스 편집부장과 편집국장을 지냈고 노사정위원회 기획위원으로 일하기도 했습니다. 그 사이에 한국노총 기획조정본부장과 대변인도 지냈지요. 노동단체, 노동언론, 노사정기구 모두에서 일했던 셈입니다. 새로운 변화를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변화의 본질을 꿰뚫어 보려 하되 서 있는 자리를 망각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국회 보좌관은 제가 잘할 만한 일인지 혹은 잘하고 있는지 솔직히 자신이 없습니다. 노동문제는 누구보다 잘 안다고 할 수도 있지만 국회는 입법과 예산에 관한 지식과 경험도 탄탄해야 하고 또 어떤 일을 하든 기본적으로 정치적인 근육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많이 부족합니다. 서형수 의원 심부름을 이리저리하고 있다고 보는 게 정확합니다."

 

Q. 박 보좌관 영향인지, 서형수 의원이 20대 국회 전반기에 환경노동위원회에 있기는 했으나 후반기 기획재정위, 국토교통위에 가서도 여전히 노동이나 복지 분야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서형수 의원 이력을 제대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겨레신문이라는 진보매체에서 신문 창간 때부터 핵심적인 역할을 한 분인데 신문기자가 아니라 신문사 경영진으로서 사장까지 맡아 일을 했습니다. 한겨레신문사 최초의 경영파트 출신 사장입니다. 진보적인 가치를 실현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두지만 항상 객관적인 조건과 현실 가능성 이런 것들을 동시에 생각합니다. 그래서 환노위에서는 노동자를 위한 노동입법 과정에서 경제 전반을 고려한 결정을 고민했고, 기재위나 국토위에서는 서민과 약자의 입장에서 거시경제정책과 부동산정책 등을 보자고 한 것입니다. 그 분이 많은 것을 고려하고 검토하기 때문에 제가 뒤따라가느라 공부를 덕분에 많이 하고 있습니다.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Q. 서형수 의원실에서 주력해온 업무, 의정활동 방향을 소개 부탁합니다.

"격차를 완화하고 불평등을 개선하는 일이라고 압축할 수 있습니다. 환노위에서 최저임금법 개정과 가사근로자 권리보장, 비정규직 차별개선 등을 비롯해 민주당에서 그간 상대적으로 소홀히 했던 고령자 고용문제를 집중 제기했고, 기재위에서는 근로장려세제(EITC)와 소득분배지표 등 국가통계의 재정립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뤘습니다. 현 국토위에서는 서민과 취약계층을 위한 주택토지정책과 주거지원 강화 문제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사회적경제의 활성화를 위한 입법과 정책개선 역시 전 기간에 걸쳐 진행한 주요 사안입니다. 하지만 의원실에서 주력한 일들이 어떤 성과를 냈냐고 묻는다면 많이 부족하고 송구하다는 답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사건건 발목을 잡는 야당 탓도 있고 저의 부족한 능력과 보다 끈질기게 최선을 다하지 못했던 우리의 문제도 있다고 봅니다."

 

Q. 서 의원실만의 차별화된, 어쩌면 독보적인 특징이 하나 있습니다. 통계청 고용동향이나 일자리 조사자료 등에 근거해 일종의 보고서에 가까운 분석 결과를 종종 발표하는 것인데요. 좀 아카데믹하다, 이건 연구소나 학자가 하는 일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솔직히 제가 잘할 수 있는 영역이지만 저는 밖으로 내보이고 싶지 않은 내용입니다. 서 의원한테만 참고용으로 드리고자 한 것인데 서 의원은 의미가 있다며 내보내자고 합니다. 평소 통계와 수치를 중시할 뿐 아니라 잘못된 가짜뉴스 등에도 비판적이거든요. 가령 최저임금 인상의 고용 영향과 관련해 아전인수 해석이 많을 때 이런 건 국민에게 진실을 알려야 한다, 구조개혁을 하려면 감수할 부분도 있고 긍정적인 요소도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물론 고용 감소 영향이 없다는 정부 쪽 입장에도 우려를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경제 전체 모습이 드러나는 한국은행의 국민대차대조표나 국제투자대조표 이런 것도 중시합니다. 외환위기 전후로 우리 경제가 어떻게 달라져 왔는지 구조적인 인식을 갖고 의정활동에 임한다는 입장입니다." 

 

일자리와 노동문제, 소득분배 같은 공적인 영역의 일 해나가고파

 

Q. 보좌관 일 외에 특별한 취미나 따로 공부하는 분야가 있습니까.

"별다른 게 없네요. 운동도 거의 안하는데 필요성은 느껴요. 집에서 하는 '호작질'(손장난)은 좀 좋아합니다. 악기 만지고 미디(작곡 프로그램)도 해보고 합니다. 붓글씨, 그림 등 같은 것도. 재봉틀도 좋아합니다. 우울하거나 안 좋은 일 있을 때 마음 다스리는 수단으로 찾는 것 같아요. 공부는 하던 일을 계속 하는 데 필요한 공부와 모르는 새로운 분야의 공부가 있죠. 게으르지만 계속 하긴 합니다."

 

Q. 고향인 밀양을 비롯해 서 의원 지역구인 양산 등 경남에는 종종 가는 편입니까.

"양산은 지역보좌진이 따로 있기도 하고 자주 가지 못합니다. 고향도 마찬가지예요. 벌초에 매번 빠져서 미안합니다. 대신 누나가 밀양에 살고 있고 부모님을 모신 곳이 있어서 1년 한두 번 정도 가는 편입니다. 가서 친구들도 거의 만나지 못해요. 아쉬울 때도 있지만 이미 고향을 떠나 30년이 더 지났습니다. 가끔 서울에서 옛 친구들을 만나고 고향에 대한 추억과 사랑을 갖고 살아가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Q. 앞으로 삶의 계획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

"지금 하는 일과 비슷한 일들을 좀 더 할 것입니다. 일자리와 노동문제, 소득분배와 같은 영역의 공적인 정책을 다루는 일들을 이어나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을 더 잘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이 있다면 과감한 변화도 시도해봐야겠지요. 그 후에는 조용히 저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습니다. 뭔지는 잘 모르겠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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