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연결되어 있다' 철학자도 강조
서로를 그저 타자로 여기면 사랑도 놓쳐

오래전에 봤던 연속극이라서 지금은 제목도 생각나지 않지만 남자 선생님과 여자 제자 사이의 사랑 이야기인데, 그 여고생이 말했던 대사가 너무 인상적이라서 지금까지 생각난다. 여고생은 사랑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남자 주인공인 그 선생님에게 "자신의 운명을 알아보지 못하고 거절한다"라는 말을 한다.

결국 이 두 사람은 결혼에 성공하기는 한다. 하지만 연속극이라서 그렇지 어떻게 자신의 '반쪽'을 알아본다는 것인가. 호감을 두며 어느 때는 소위 사랑에 빠지게 되는 현상도 나타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상대방이 결혼에까지 이르러 같이 살게 될 사람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사랑이란 무엇일까.

사랑이란 철학적으로도 중요하고 그래서 이미 플라톤은 <향연>에서 그에 대하여 논한다. 또한 헤겔도 변증법을 사랑 현상의 측면에서 풀어나가기도 한다.

그런데 필자는 M. Boss가 말한 '사랑의 정의'를 소개하고 싶다. 그는 "사랑 현상이란 상대방과 함께 있음이 지금까지 달성하지 못한 세계와의 관계 가능성을 드러나게 할 때 나타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연속극에서의 그 여고생은 아마도 '어째서 당신은 우리 사이가 이미 관계 지워진 저 세계와 하나라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말하고 있는 셈일 것이다.

이렇게 이미 앞서 던져져 있는 세계와 더불어, 세계 내부적 눈앞의 것들이 발견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하이데거는 말한다.

여기에서 '세계'란 자연 혹은 주위 사물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세계란 선행적으로 밝혀져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사물들과 관계 맺으며 그 곁에 머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이미 세계를 이해한다. 하지만 의자와 같은 물건들은 세계에서부터 자신을 이해할 수 없다. 의자는 세계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우리는 의자처럼 그냥 눈앞에 있음도 아니다. 우리는 의자와 같은 것 곁에 있으며 이러한 존재자를 우리의 현재 속에 갖고 있다.

또한 인간인 그대를 현재 속에 갖고 있으면서 그렇기 때문에만 미래적으로나 과거 추억 속에서도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의자나 고양이는 과거를 간직하거나 미래를 꿈꿀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물건들처럼 같이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결단된 자로서 존재 가능에 열려 있다. 그런 본래적 시간은 우리가 만나는 사물이나 인간에 대해 얼마만큼 자신의 존재를 열고 있느냐에 의해 결정된다.

하지만 우리는 일상에서 대개 비결단적이며 가능성에 있어 일차적으로 자신의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에서부터 존재하지 못한다. 눈앞의 것들에 빠져서 존재를 망각하고 있다고 한다.

사실 평균적 인간의 타자와 관계는 이런 '존재 이해'의 관계가 아닌 존재자적 대상 관계로서 자기 이익 중심으로 타자를 물건처럼 조종하는 관계가 될 수 있다. 이런 대상 관계 속에서는 인간은 마치 병속에 있는 물건처럼 함께 있으면서 고독을 느끼게 된다.

사랑하는 그대 곁에 머무는 이 시간에 우리가 기껏해야 지나가는 것일 뿐인 의자처럼 있게 된다면, 아마도 사랑의 운명은 알아보지도 못할 것이고 결단된 운명의 시간을 결코 열어젖힐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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