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자결주의 한계 의식
대안으로 독립전쟁 부상
교육·각계 지원으로 승리

한 회만 더 광복절 특집으로 가보겠다. 아마도 지금 이 상황과 관계없이 진행되던 일이었겠지만, 공교롭게도 독립군의 승전을 다룬 영화 <봉오동전투>가 이달 초 개봉했다. 봉오동 전투는 1920년에 있었던 독립군과 일본군의 정면대결이다.

이 전투는 수세에 몰렸던 독립군이 일본군에게 기지를 발휘해 복수했던 전투가 아니었다. 단순히 어려운 상황에서도 일본에 한 방 먹였다는 기분으로 보고 넘기기엔 아까운 역사적 사건이어서 약간의 설명을 보태고자 한다.

◇전투의 개요

안수길의 장편소설 제목으로도 유명한 북간도는 두만강 건너편이다. 중국에서는 연길이라고 부른다. 이 지역은 청나라가 들어선 후 일반인들의 출입을 금지한 지역이었다. 만주족의 조상이 시작된 신성한 곳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곳은 19세기 후반 중국의 통제가 느슨해지면서 한국민들이 생활터전을 잡고 사는 곳이 되었다.

봉오동 전투는 1920년 6월 6일에서 7일까지 벌어진 전투를 말한다. 독립신문에 따르면, 일본군은 157명이 전사한 데 비해 독립군은 4명만 전사했다. 물론 일본은 아군 1명만 죽었고 독립군 30명이 전사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일본이 패배한 후 이성을 잃고 간도 지역의 우리 민간인들을 학살한 것을 보면 일본 측 주장의 신빙성은 많이 떨어진다.

◇외부적 상황

지금으로부터 109년 전인 1910년 8월 29일 이완용과 당시 총감 데라우치 사이에 합의된 한일병합조약이 정식으로 발효되었다.

이 결과로 우리나라는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대한제국은 사라진 것이다. 그 후 조선을 역사에서 지우기 위한 각종 조치가 일제에 의해 자행되었다. 우리 민족의 운명은 출구가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 갇혔다. 그리고 1919년 3월 1일 독립을 향한 국민의 열망이 독립만세 운동으로 분출되었다.

1914년 7월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금방 끝나리라고 생각했던 이 전쟁은 900만 명이 넘는 사상자를 남기고 1918년 11월에야 종료됐다.

각자 참호 속에 파묻혀 전진도 후퇴도 하지 못한 채, 양측이 막대한 물량을 퍼부은 지루한 소모전이었다. 이런 상황을 종료시킨 가장 큰 원동력은 미국의 참전이었다. 미국은 이 참혹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이를 계기로 세계질서의 패권국가로 등장할 수 있었다. 당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은 종전되기 전인 1918년 1월 상원 연설에서 평화원칙 14개 조항을 선언했다.

여기에 "주권에 관한 사항 결정 시, 해당 민족의 이익이 권리관계를 가진 정부의 요구와 동등한 비중을 가져야 한다는 원칙을 준수"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소위 민족자결주의였다. 이에 상하이,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그룹은 새로운 희망을 품게 되었다.

1차 세계대전의 또 다른 수혜국은 일본이었다. 일본은 1914년 8월 23일 참전을 선언하고 독일이 가지고 있던 산둥반도와 괌, 사이판 등 남태평양 제도를 빼앗았다. 전쟁이 끝났을 때 일본은 승전국이었다. 일본은 이 지역의 확보를 주장했다.

1919년은 승전국들의 회의로 시작됐다.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희망의 한 줄기 빛을 찾은 독립운동 세력들은 이 회의에 참석해 우리나라의 상황을 이해시키려고 총력을 기울였다. 더불어 우리 국민은 3·1운동으로 독립의지를 표현했다.

하지만, 우리의 주장은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윌슨이 내세웠던 민족자결의 원칙은 패전국이 가졌던 식민지에만 적용되었다. 자연스레 승전국인 일본은 산둥반도, 남태평양의 식민지를 확보할 수 있었고 우리나라는 독립운동의 방향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파리강화회의에서 우리의 주장을 펼 기회는 잡지 못했지만 3·1운동이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미국 의회는 새롭게 세계사 주요무대로 등장한 태평양에서 일본의 움직임을 견제할 필요성을 느꼈고 그 명분을 3·1운동으로 드러난 일본의 가혹한 식민통치방식에서 찾았다. 특히 제암리 교회에서 자행된 학살은 많은 이들의 공분을 이끌어냈다.

미국 의회는 우리나라 사례를 근거로 일본을 견제했다. 나아가 미국과 일본이 태평양지역에서 충돌할 가능성이 고조되고 있었다.

▲ 실제 1920년 6월 6일부터 7일까지 벌어진 봉오동 전투를 소재로 삼은 영화 <봉오동 전투> 스틸컷.
▲ 실제 1920년 6월 6일부터 7일까지 벌어진 봉오동 전투를 소재로 삼은 영화 <봉오동 전투> 스틸컷.

◇내부적 대응 - 독립운동에서 독립 전쟁으로

3·1운동으로 촉발된 독립에 대한 열망은 임시정부의 수립으로 결실을 보았다. 1919년 3월 17일 연해주, 4월 11일 상하이, 4월 23일 한성에서 각각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9월 11일 세 곳의 임시정부는 하나로 통합되고 그 본부를 상하이에 두기로 하였다.

이 무렵에는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환상도 깨졌다. 그래서 외교적 방법으로 독립을 쟁취하자는 주장은 힘을 잃어갔다. 그리고 미국과 일본이 무력으로 충돌할 때는 미국의 편에서 일본과 무력으로 싸우는 게 독립의 지름길이라는 생각마저 겹쳐 독립전쟁에 관한 주장이 대안으로 등장했다.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총리로 취임한 이동휘는 간도 지역에서 활동한 무장투쟁론자였다. 독립전쟁으로 한발 다가섰다. 안창호도 비슷한 생각을 했었다. 안창호는 1920년 1월 3일 신년축하회에서 군사, 외교 등의 분야에서 어떻게 독립전쟁을 준비해야 하는지를 제시했다.

4월에는 윤기섭 등이 제출한 군사에 관한 건의안이 거의 전원의 찬성으로 임시의정원을 통과했다. 이 건의안은 임시정부의 모든 군사기관을 만주로 옮기고 2만∼4만 명의 병력을 편성해서 독립전쟁을 개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독립신문 1920.4.3.)

이런 흐름을 따라 간도 지역의 각종 군사세력이 차례차례 임시정부와 소통하며 체계를 갖춰나갔다. 특히 이 과정에서 봉오동 전투의 주역 홍범도는 북간도 일대의 독립운동 세력들의 통합을 시도했다. 그 결과 봉오동 전투의 주역인 대한북로독군부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그리고 주변 다른 세력들을 통합해 일본의 도발에 대비했다.

하지만 의지만으로 전쟁을 수행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현대의 전투도 그렇지만 자금 지원이 없는 군대는 전투를 지속할 수 없다. 총도 돈이고 총알도 돈이다. 사기만 있다고 먹지 못한 군인들이 임무를 수행할 수도 없다. 사람과 자금이 준비되어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사람은 교육으로 키워야 했다. 다행히도 우리 국민은 지금도 교육열로는 세계에서 둘째라면 서러운 사람들이다. 어려울수록 교육에 투자했고 실제로 일제가 강점을 준비하던 1900년대에도 서전서숙을 필두로 자생적인 교육기관을 만들었고, 합병 직후인 1911년에는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했다. 이 신흥무관학교가 배출한 학생은 3000여 명에 달한다. 3000여 명의 장교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이들이 1920년 이후 독립전쟁의 주축이 되었다.

다음으로 국민 개개인의 뼈를 깎는 노력이 있었다. 북간도 일대는 기층민들이 일제의 탄압을 피해 탈출한 두만강 북쪽이었다. 당연히 기존 살던 지역보다 결코 비옥한 곳이 아니었다. 당연히 이곳에 정착한 국민은 생활이 여유로울 수 없었다. 그럼에도, 독립군의 적극적 지원자가 되었다. 넉넉해서 남은 것으로 독립군을 지원한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일본은 이 지원을 끊으려고 지속적으로 괴롭혔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 이어진 지원은 그야말로 주민들의 피와 땀이었다. 그래서 봉오동 전투는 세계정세에 맞춰 탄력적으로 설정한 정책적 방향 아래 합쳐진 독립을 위한 피나는 국민의 노력과 이를 저지하기 위한 일본이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부딪힌 싸움이다.

◇새로운 역사를 위하여

일제 강점기의 여러 기록을 보면 일제는 우리 한국인들을 나치가 유대인을 대하듯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우리는 이 모든 일이 1945년에 끝났다고 생각했었다.

해방 후 74년이 지난 올해 일본은 다시 우리나라를 도발했다. 총칼만 없지 다시 우리에게 굴복을 강요하고 있다.

일본은 1910년이나, 1945년이나, 2019년이나 줄곧 우리에 대한 태도가 변하지 않은 것 아닌지 의심스럽다. 그러지 않고서는 뻔뻔스레 욱일기를 휘두르면서 자신의 견해만을 강권하는 일본의 태도를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분명히 다르다. 우리는 국제 정세를 적극적으로 읽고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어떤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싸워나갈 수 있는 자발적 국민의 힘이 있다. 이 두 가지를 바탕으로 봉오동에서 우리는 승리할 수 있었고 지금도 다르지 않다. 하지만, 미래에는 두 나라가 과거사에 대해 공감하며, 전쟁이라는 잘못된 길이 아니라 새로운 방향을 설정하는 건설적인 역사가 쓰이기를 기대해본다.

※이 기획은 LH 한국토지주택공사와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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