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관계
이별·상실 겪을 때 고통 오죽하랴

삼복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맹하의 어느 날이었다. 반려견과 함께 서로 의지하며 지내던 노인이 애별리고(愛別離苦)를 겪는 사연이 방송돼 보는 이의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파지를 주워 생계를 유지하는 노인에게 반려견은 자식이나 다름없었다. 노인의 고단하고 쓸쓸한 삶을 위로해준 것은 반려견이었다. 그렇게 오순도순 서로에게 마음을 붙여 지내던 중, 그들의 가정에 거센 풍파가 몰아쳤다. 노인이 별안간 쓰러진 것이다. 노인의 병세는 심각했다. 뇌출혈에다가 암까지 동반해 꼼짝없이 병원에 누워있어야 했다.

더 이상 반려견을 돌보지 못하리란 걸 안 노인은 "녀석들에게 두 번 상처 주긴 싫다"며 좋은 사람에게 입양 보내기로 마음을 먹는다.

"이제 잘 가. 사랑했다. 너희들 때문에 아빠가 즐거웠어. 부디 좋은 주인 만나 잘 살아라. 아순이·아롱이 안녕."

떨리는 목소리로 그들에게 작별을 고하는 장면은 얼마나 가슴을 짠하게 하던지…. 소맷부리로 눈물을 닦으며 돌아서는 노인의 모습이 TV 화면을 가득 채우는 순간, 얄궂게도 동병상련에 처한 '메리' '워리'의 모습이 번개처럼 떠올라 나는 더 가슴이 내려앉았다.

내가 '메리' '워리'를 처음 만난 곳은 동네 어귀에 자리 잡은 집 앞이었다. 개발도 비껴간 변두리 오두막에서 노부부 곁을 지키고 있는 녀석들은 자못 위용을 과시했다. 집이라고 해봐야 해체된 대형 스피커 통 같은 속악한 가재도구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것도 과람하다는 듯 늘 명랑했다. 매일 아침 산책하러 나갈라치면 그 집을 지나치게 되는데, 그때마다 먼저 꼬리 치며 반가워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며칠 전부터 이 녀석들 표정이 시무룩했다. 무에 그리도 낙담했는지 땅바닥에 퍼지르고 앉아 수심에 잠겨있었다. 충혈된 눈을 희번덕거리는 걸 보아하니 공포와 공황에 잔뜩 빠져있는 듯했다. 그러고 보니 노부부가 사는 집에는 생기가 없어 보였다. 인기척 없는 집안은 무거운 공기만 가득했다.

도대체 무슨 이유인가 했더니, 나와 동산을 돌며 담소를 나눌 만큼 정정하던 주인 어르신이 돌연 유명을 달리했다는 것이었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사별만큼 고통스러운 일이 있을까. 여태껏 겹겹이 쌓인 묵은 정으로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왔을 터, 녀석들인들 가족의 부재와 상실감이 어찌 비통하지 않으랴. 초상이 나면 집안에 키우던 벌도 허리에 흰 띠를 두르고 나온다는데, 하물며 노부부와 가족처럼 지냈던 동물이니 이별과 상실의 고통이 오죽할까 싶은 것이다.

아들네로 비접을 나간 노모가 간간히 들러 사료를 챙겨주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지켜주지 않는 야생과도 같은 삭막한 빈집에 매여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하는 강박감, 다른 가족에게 입양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고뇌까지. 그들에게 불어 닥칠 어두운 미래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아프다. 이런 암담한 상황은 트라우마가 되어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임을 알기에 더욱 그랬다.

지금 내가 녀석들에게 해줄 수 있는 선물은 예전과 같이 눈 맞춰 주고 관심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밤새 별 일 없었는지, 밥은 잘 챙겨 먹는지, 한 번 돌아보고 사정을 살펴봐야 마음이 편할 것 같다. 이러다간 공연히 나까지 속이 쓰린 아픔을 겪게 될지도 모르겠다.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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