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근 워킹갤러리 대표 소장 1990년~타계 전 그린 43점 전시

뜻밖에 색감이 밝아서 놀랐다. 그의 고단했던 삶, 그리고 그가 관심을 쏟았던 낮은 곳의 사람들을 생각하며 잔뜩 어둡고 무거울 것이란 예상이 빗나갔다. 13일부터 창원시 마산합포구 창동 금강갤러리에서 열리는 '현재호' 전의 첫인상이다.

현재호(1934~2004) 화백 전시는 2007년 경남도립미술관에서 '영원한 보헤미안 현재호'라는 제목으로 그의 작품 세계를 조명한 후 경남은 물론 타지역에서도 꾸준히 열리고 있다. 2015년을 중심으로 몇 번 큰 전시가 열렸는데, 전시마다 소장자가 달랐다. 그만큼 많은 작품을 남겼다는 뜻이다. 현 화백과 형님 동생하고 지내던 이선관(1942~2005) 시인의 증언으로 1만 2000점 정도 될 것으로 추정한다.

대표적인 현재호 작품 소장자로 강오복(78) 씨와 최태호(64) 도예가가 있다. 그리고 또 한 명 중요한 이가 창원시 마산합포구 남성동에 워킹갤러리를 운영하는 신명근(64) 대표다. 이번 전시는 신 대표가 소장한 작품 중에서 43점을 고른 것이다.

▲ 현재호 화백 작품 '교향(交鄕)' 앞에 선 신명근 대표. /이서후 기자
▲ 현재호 화백 작품 '교향(交鄕)' 앞에 선 신명근 대표. /이서후 기자

◇고단했던 일생, 마산 정착해 안정

"대부분 1990년부터 타계할 때까지 작업한 것들입니다. 1980년대 중반까지 작품은 어두우면서 뭔가 무게감이 있고, 1990년 이후 작품은 밝으면서 장식성이 강합니다." 전시장에서 관객을 맞이하던 신 대표의 설명이다. 그가 소장한 현 화백 작품을 이런 식으로 대중에게 선뵌 것은 도립미술관 전시 이후 처음이다.

"그동안 나름 전시를 해볼까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러다 올해 15주기를 앞두고 이번에는 꼭 전시를 해야겠다 마음을 먹었지요."

현 화백은 2004년 9월 11일 새벽 마산의료원 중환자실에서 눈을 감았다. 그해 6월 뇌출혈로 쓰러진 후 석 달을 넘기지 못했다. 참 고단한 인생이었다. 일제강점기에 부산에서 태어난 현 화백은 어머니를 모르고 자랐다. 두 살 때 26살 차이가 나는 누나를 따라 만주, 북경, 대련, 상해로 떠돌다 해방 후 다시 부산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곧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보육원에서 자라게 된다.

▲ 1990년대 생전 현재호(모자 쓴 사람) 화백과 함께한 신명근 대표.  /신명근
▲ 1990년대 생전 현재호(모자 쓴 사람) 화백과 함께한 신명근 대표. /신명근

고등학교 졸업반 때 우연히 친구가 준 빈센트 반 고흐의 판화집을 보고 크게 감명을 받아 스스로 화가의 길을 걷는다. 1950년 민주신보사 주최 민전에서 잇달아 특선을 하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1960~70년대에는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활동을 했고, 1981년부터 마산에 정착해 지역 특유의 정서를 자신만의 감성으로 화폭에 담았다.

신 대표가 현 화백을 알고 지낸 건 1970년대부터지만, 직접적으로 연결된 것은 1990년 마산 창동에 창동갤러리를 열면서다.

그는 갤러리를 열면서 현재호 작가와 전속 계약을 맺는다. 화랑과 작가가 전속 계약을 맺은 건 경남에서 최초였다고 신 대표는 설명한다. 그렇다면, 신 대표와 전속 계약을 하며 현 화백은 만년에 안정적으로 작업을 할 수 있었고, 1990년 이후 밝은 색감은 이런 생활과 마음의 안정에서 비롯한 것이 아닐까 추측할 수 있다.

▲ 창동예술촌 골목에 그려진 현재호 화백의 '교향'. 벽화는 제목을 무제라고 했다. /이서후 기자
▲ 창동예술촌 골목에 그려진 현재호 화백의 '교향'. 벽화는 제목을 무제라고 했다. /이서후 기자

◇새, 집, 어머니로 반복되는 상징

이번 전시의 대표작은 '교향(交鄕)'이란 500호(세로 197㎝, 가로 333㎝)짜리 작품이다. 1995년에 그린 것인데, 현 화백 작품 중 가장 크다. 지금 창동예술촌 골목 벽화로도 쓰인 것이다. "선생의 작업실에는 이 정도 크기를 그릴 공간이 없어요. 다 그리고는 둘둘 말아서 가지고 나오셨는데, 액자는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처음 했어요."

대부분 작품이 '무제'인 것과 달리 이 작품에는 '교향'이란 제목이 붙었다. 그림이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것 같아서 교향곡의 교향(交響)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한자가 다르다. 의도적으로 울릴 향(響) 자리에 고향 향(鄕) 자를 쓴 것 같다. 마치 그의 생에서 그리워했던 것, 혹은 추구했던 것들이 서로 어우러지는 걸 표현한 듯하다. 철학자들이 만년에 나에게 철학이란 무엇이었나 늘 정리했듯, 현 화백은 이 작품을 통해 '나에게 그림은 무엇인가'를 정리한게 아닐까 싶다.

▲ 금강미술관 전시 중 돝섬 풍경을 그린 작품. /이서후 기자
▲ 금강미술관 전시 중 돝섬 풍경을 그린 작품. /이서후 기자

이런 맥락에서 살펴보면 그의 작품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상징이 대부분 이 작품 안에 담겨 있다. 제일 먼저 '집'을 들 수 있다. 현 화백이 모든 것의 시작점이라고 했다는 신 대표의 설명으로 유추하면 지금, 여기를 상징한다고 풀이할 수 있겠다.

현 화백의 작품 속에는 자주 큰 새와 작은 새가 등장한다. 큰 새는 현 화백의 삶에서 언제나 부재(不在)였던 어머니, 작은 새는 현 화백 자신이다. 예컨대 1994년에 눈 오는 풍경을 그린 작품에 대한 신 대표의 설명을 들어보자. "그해 겨울 눈이 많이 왔어요. 눈이 온 다음 날 작업실에 가니까 이 작업을 하고 있더라고. 나무 위에 어미 새와 새끼 새가 있는데, 새끼 새가 '엄마 눈이 엄청나게 와요' 하고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이죠?"

현 화백은 실제 가슴을 드러낸 여성으로 자주 어머니를 형상화했다. 그리고 어미 새와 새끼 새를 통해 그의 삶에 없었던 어머니와 자신의 다정한 시간을 표현했던 것 같다.

황소 역시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한다. 현 화백은 한때 조치원에서 머슴살이를 했는데, 소를 잘 다뤘다고 한다. 그에게 소는 자신의 과거이자 든든하고 기반이 되는 '역사' 혹은 '땅'이나 '선조'의 상징인 듯하다.

이 외에 활짝 피운 꽃이나 구름 위의 사람들도 그가 자주 활용하는 상징이다. 마지막으로 작품 한가운데 있는 지휘자가 바로 현재호 화백 자신이다. 신 대표의 설명을 들어보자.

"현 화백이 딱 이렇게 생겼어요. 160㎝ 단신이지만 단단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세히 보면 지휘자가 붓을 잡고 그림을 그리는 것 같죠? 자신에게 그림을 그리는 일이 오케스트라 교향곡을 연주하는 것과 같다는 뜻인 것 같아요." 전시는 9월 15일까지. 월요일 휴관, 추석 연휴 정상운영. 문의 010-9308-6578.

▲ 금강미술관 전시 중 황소가 나오는 작품. /이서후 기자
▲ 금강미술관 전시 중 황소가 나오는 작품. /이서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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