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이 겪는 일상 속 공포 공감 못하고
까칠하고 이상한 사람 취급하기 일쑤

며칠 전, 퇴근길에 택시를 탔다.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택시가 평소 가는 길이 아닌 낯선 길로 접어드는 것이 아닌가.

순간 놀란 내가 물었다. "아저씨! 지금 어디로 가시는 거예요?"

당황한 나를 백미러로 슬쩍 한번 쳐다보던 아저씨가 말했다. "이쪽으로 가면 더 빠릅니다."

11시가 넘은 시각에 평소와 다른 길로 접어드는 택시. 순간 밀려오는 공포를 애써 누르며 힘주어 말했다. "아니요. 그냥 해안도로로 가주세요!"

자신의 선의를 받아주지 않은 내가 불쾌했던 걸까. 택시 기사는 미친 듯이 속력을 내기 시작했고 덩달아 내 심장은 미친 듯이 쪼그라들었다. '112 버튼을 누를까?' 범죄는 아니니 섣불리 판을 키울 수 없었다. '세워 달라고 말할까?' 늦은 밤 다른 택시를 탄다는 보장이 없었다.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생각한 끝에 현실적인 대안을 찾았다.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하지만 전화를 받지 않았다. 불안함에 식은땀이 났다. 여차하면 긴급전화 버튼을 누를 태세를 한 채 무사히 집에 도착하기만을 기도했다.

집에 도착한 지 10분쯤 지났을까. 남자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러쿵저러쿵 택시에서 일들을 얘기했다. 남자친구는 전화를 못 받아서 미안하다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덧붙였다. "근데, 아저씨는 진짜 지름길로 가려고 했는데, 혹시 민감하게 반응한 건 아닐까?"

물론, 내가 택시 기사의 선의를 오해했을 수 있다. 아니, 무사히 집까지 도착했으니 오버했을 확률이 100%다. 하지만 나는 똑같은 상황이 다시 오더라도 똑같은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다. 그 근본적인 이유를 내 남자친구는 모르는 것이다. 어디 내 남자친구뿐이겠는가? 대부분 남성은 잘 모른다. 이 시대 여성들이 겪는 일상의 공포를. 안다고 해도 전부 다 알지는 못한다.

나는 겁이 많다. 늦은 밤 골목길을 걷거나 새벽녘 혼자 산을 타기 위해선 엄청난 용기를 동반해야 한다. 혹시, 사람을 만날까 두려워서이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귀신보다 매일 보는 사람이 더 무서울 때가 있다. 길을 걸을 때도, 잠을 잘 때도, 택시를 탈 때도 혹시나 하는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조그마한 소리에도 벌떡 일어나 잠긴 문을 다시 점검해야 안심이 된다. 배달음식을 받을 때는 집안에 누군가와 같이 있다는 여우주연급 연기를 해야 하고, 세탁기 AS 아저씨 방문에는 아무리 추워도 현관문을 활짝 열어놓는다. 심지어 회사에서 혼자 남아 일할 때도 문을 잠그고 일을 하는 나는 진짜 겁쟁이다.

처음부터 겁쟁이였던 건 아니다. 20대까지는 천둥벌거숭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겁을 상실한 채 살았다. 30대를 지나며 세상 무서운 걸 알면서 겁이 많아졌다. 성범죄가 뉴스 속이 아닌 내 일상 속에 있다는 걸 알아버린 순간, 늦은 밤 작은 소리도, 택시 기사의 낯선 선의도, 배달원의 불필요한 친절도 나에게는 위협이 되었다. 언제든지 내가 위험에 처할지 모른다는 불안함에 늘 경계를 늦추지 못한다. 나 같은 겁쟁이가 어디 나 혼자뿐이랴. 이 시대 여성이라면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가슴 한 칸에 공포심 하나쯤은 키우며 살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 사회는 여성들의 공포를 잘 알지 못한다. 잘 알지 못하기에 성범죄를 적극적인 구애 행위로 두둔하고, 성범죄가 판타지가 되고 농담거리가 된다. 심지어 모든 남성을 잠정적인 성범죄자로 취급하는 거냐며 따지고 화를 낸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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