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대 오행당약국 사장
1984년에만 1400만 원 등
16년 동안 물심양면 지원
이재문 현 경남야구협회장
지도자로 대붕기 우승 견인
"근성 하나만은 마산 최고"

마산고등학교는 지역 명문 고등학교로 '공부벌레들' 집합소였다. 교사도, 학생도 그다지 야구부에 관심이 없었다. 예산도 늘 부족했다. 이렇다 보니 1970년대에는 마산상고(현 용마고)에 눌려 전국규모대회 출전조차 쉽지 않았다.

마산고 야구부 새 역사가 시작된 건 1980년대다. 마산고는 1974년 팀 해체 후 6년 만에 재창단했다. 1982년 청룡기쟁탈 전국고교야구대회 16강에 오른 데 이어 1984년 대통령배대회 4강 진출 등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1990년엔 대통령배대회 준우승을 거두더니 1994년 열린 '제46회 화랑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창단 이후 처음으로 우승하며 전성기를 맞았다.

마산고 야구부가 1980~90년대 뿌리내리고 꽃을 피울 수 있었던 건 동문들이 후원회를 꾸리고 뒷바라지를 했기 때문이다. 그 중심엔 당시 마산 창동에서 오행당약국을 운영한 김용대(마산고 13회) 씨가 있었다. 그는 1984년 한 해에만 1400여 만 원을 야구부에 지원했다.

마산고 야구부 공식 소개 자료에도 '김용대 회장이 야구부 부활을 위해 약 16년 동안 야구부에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했고, 야구부가 존재를 알리는 데 동력이 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 마산고는 1990년 5월 제24회 대통령배 고교야구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했다. 김용대(왼쪽 둘째) 마산고 야구부 후원회장 모습도 보인다. 그는 마산에서 오행당약국을 운영하며 마산고 야구부를 뒷바라지했다.  /경남도민일보 DB
▲ 마산고는 1990년 5월 제24회 대통령배 고교야구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했다. 김용대(왼쪽 둘째) 마산고 야구부 후원회장 모습도 보인다. 그는 마산에서 오행당약국을 운영하며 마산고 야구부를 뒷바라지했다. /경남도민일보 DB

마산고 제23대 총동창회 사무총장을 지낸 이정국(42회) 씨는 '선배 김용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1980년대 마산 경제 수준이란 게 빤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약국에서 번 돈을 거의 야구부에 쏟아부었던 것 같아요. 운동부 전용 버스도 사주시고, 선수들 자주 불러 회식시켜주며 격려도 많이 해주었습니다. 졸업생이 모교에 '이해 관계'라는 게 얼마나 있었겠습니까. 거의 맹목적인 후배사랑, 모교사랑이랄까요(웃음)."

김용대 후원회장이 작고한 이후인 2000년대 마산고 야구부는 다시 휘청했다. 김종혁(36회, 본초당 한의원)·최병무(40회)·김낙규(43회)·장봉석(46회) 씨 등이 야구부 후원회를 이어갔다. 하지만 2002년 야구부 해체 분위기가 또 한번 조성됐다. 학교는 2003년 야구부 신입생을 2명만 선발하기도 했다. 다행히 2003년 이효근 감독 부임 등 분위기 쇄신으로 지금껏 마산고 야구부를 그라운드에서 만날 수 있다.

이 밖에 마산고 27회 졸업생인 장광기 씨도 지난 1983년 모교에 실내연습장(140평 규모)을 지어 기증해 '내리사랑'을 이어갔다. 당시 전국에서 4번째로 지어진 실내연습장이었다. 하지만 2002년 태풍으로 망가져 철거되기도 했다. 실내연습장은 지난 2007년 동문 강병중 넥센타이어 회장 지원으로 다시 건립될 수 있었다. /민병욱 기자

이재문(64·사진) 경남야구협회장은 1987~1993년, 1999~2007년 마산용마고(마산상고 시절 포함) 감독을 맡았다.

그는 용마고 지휘봉을 잡으면서 1989년 전국체전 3위, 1993년 대붕기대회 준우승, 1999년 무등기대회 4강 등을 기록했다. 그러다 2001·2004년 대붕기대회 우승까지 거머쥐었다.

4대 메이저대회(청룡기·황금사자기·대통령배·봉황대기) 우승을 차지하지는 못했지만, 용마고 야구부 전성기 초석을 닦았다.

이 회장은 마산성호초등학교 5학년 때 야구를 시작했다. 이유는 '유니폼이 멋있어서'였다. 그는 이후 마산중을 거쳐 마산상고에서 주로 내야수로 활약했다. 1973~75년 시절이다. 동기가 유두열이었고, 한 해 위 선배가 정학수, 한 해 아래 후배가 임정면·박용성이었다. 멤버에서 짐작되듯, 마산상고는 당시 성적면에서 약진을 이뤘다. 하지만 4강 문턱에서 번번이 좌절했다.

"우리 고3 때 '4강 제도'가 도입됐어요. 전국대회 4강 안에 들어야 대학 진학이 가능한 거죠. 그런데 우리가 8강까지만 3번 진출했던 거로 기억합니다. 어쨌든 당시 고교야구 열기는 엄청났죠. 전국대회 4강만 올라도 카퍼레이드를 할 정도였으니까요. 대회가 서울서 열리면, 마산상고 재학생들도 수업 빼먹고 자비로 그 먼 곳까지 응원오곤 했습니다."

그는 그래도 진학에 성공하면서 영남대에서 선수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다 1979년 모교 마산중을 시작으로 지도자 삶을 살았다.

이 회장은 한때 광주일고 지휘봉을 잡기도 했다. 박재홍·이호준·김종국 등이 선수로 뛰던 시절이다.

"당시 광주일고 인기가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완도로 전지훈련을 갔는데, 기자들이 함께 숙식하며 상주를 했습니다. 이태일(전 NC다이노스 대표) 씨가 기자로 활동할 때였습니다. 당시 이 기자와 가볍게 얘길 나눴는데, '광주일고 올해 목표 우승 세 번'이라는 기사가 나가 난처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허허허."

그는 선수·감독을 거치는 동안 하나 느낀 게 있다고 한다. 근성 하나만은 마산을 따라올 데가 없다는 것이다.

"마산상고 선수 시절 광주일고와 붙어 8강서 떨어졌어요. 그날 저녁 식당에서 서로 마주쳤는데요, 우리가 완전히 으르렁으르렁했죠. 우리 기에 눌려서 이 친구들이 꼼짝도 못 하고 가버리더군요. 마산 선수들이 유독 기가 세고 악착같은 근성이 있는 건 분명하죠." /남석형 기자

<참고 문헌>

△<마산시 체육사>, 조호연 책임 집필, 마산시, 2004 △경남야구협회 소장 자료 △경남도민일보 DB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