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 존중 지구인에 반한 외계인 소재 로맨스 소설, 사실적 묘사 더해 매력적

8월의 중순이 넘어가는데도 여전히 무더운 날들의 연속이다. 시원한 냉방 시설이 갖춰진 실내에서 일하는 나도 이렇게 지치는데, 바깥 활동을 해야 하는 분들의 노고는 오죽할까 싶다. 가족 중 절반이 더위와 추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직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비록 나는 시원한 곳에 있다 하더라도 더운 날씨는 언제나 야속하기만 하다.

그래도 계절은 언제나 늦는 법이 없어서 입추가 지나자 미묘하게 아침저녁으로는 온도가 낮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덥고 습한 바람 사이로 존재감은 약하지만 설핏 드러난 선선한 기운은 마치 가을이 오고 있다는 신호인 것 같아 그렇게 위안이 될 수가 없다. 그리고 높다란 하늘과 장엄한 노을, 그 뒤에 따라오는 선명한 달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비록 더위는 무서워도 이 계절은 여전히 아름답게 느껴진다.

내가 애쓴다고 더 빨리 오지도, 그렇다고 더디게 오지도 않는 계절을 보며, '나'는 얼마나 작고 나약하며 의존적인 존재인지 절감하게 된다. 동시에 내가 노력하지 않아도 얻게 되는 것들로 나의 하루와 길게는 삶이 풍요로워지는지를 생각하다 보면 내가 가진 이 시간과 삶이 거저 주어진 선물 같다는 생각이 든다.

도처에 즐비한 생명체와 그 기운, 때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사소한 것들까지. 어느 것 하나 모난 것 없이 아름답게 연결되어 있는 것만 같다. 그리고 문득 그 공간에서 가장 이질적인 존재로 서있는 나 자신을 인지할 때면 어쩐지 묘한 기분에 사로잡히곤 한다. 언제나 모든 면으로 무해한 사람이고 싶지만 삶을 영위하기 위해 하는 사소한 행위만으로 이미 지구에 해가 되는 존재가 바로 '나'이자 '우리'의 실체가 아닐까.

최근 들어 이 지구라는 행성, 그리고 그 안에 주어진 자연스러운 환경 속에 대체로 자연스럽지 못한 방식으로 존재하는 인간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되었다. 어떤 방식으로 살아야 할까? 이 거대한 우주와 자연 속에 나라는 존재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모양새란 무엇일까.

그러다 뜻밖에도 정세랑 작가의 소설 <지구에서 한아뿐>을 통해 그 질문에 대한 답이라 하기엔 거창하지만 모방해도 좋을 만한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2019년 여름에 발표된 <지구에서 한아뿐>은 정세랑 작가가 2012년

▲ 책 <지구에서 한아뿐> 표지.
▲ 책 <지구에서 한아뿐> 표지.

스물여섯에 쓴 초기작을 다시 고쳐 개정판으로 재출간한 책이다.

작가의 작품 가운데 <옥상에서 만나요>와 <보건교사 안은영>의 경우 우리 책방에서 인기 있는 책들 중 하나였기 때문에 <지구에서 한아뿐>이 재출간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개인적으로도 기대를 많이 했던 기억이 난다.

<지구에서 한아뿐>은 정세랑 작가의 두 번째 장편소설로 외계인 경민과 지구인 한아의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외계인과 지구인의 사랑 이야기라니, 이렇게만 소개한다면 독자에 따라 소재가 사뭇 진부하다고 생각하거나 선호하는 장르가 아니라는 이유로 읽지 않을 책으로 분류해 버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지구에서 한아뿐>의 첫 장을 펼치는 순간, 그 모든 우려와 편견은 잊어버린 채 몰입해서 읽을 수밖에 없었다.

이 책의 주인공인 한아는 자연친화적인 삶을 영위하며 몸소 저탄소 생활을 실천하는 인물이다. 누군가의 추억이 담긴 옷을 리폼하는 일을 하면서 '환생'이라는 작은 옷 수선집을 운영하는 한아에게는 만난 지 11년 된 남자친구 경민이 있다. 자유로운 영혼으로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사는 경민은 유성우를 본다는 이유로 캐나다로 여행을 떠나게 되고, 경민이 떠난 곳으로 운석이 떨어지는 소동이 있었지만 다행히도 무사히 한아 곁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어쩐지 여행에서 돌아온 경민은 이전에 한아가 알던 것과는 사뭇 달라진 모습과 행동을 보이게 되는데, 늘 한아의 희생과 사랑에 대해 당연하게 여기던 경민이 온전히 한아에게 집중하고 함께 있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해준다는 점에서 그랬다. 그리고 이것은 한아를 기쁘게도 했지만 동시에 불안하게 만든다.

달라진 경민의 모습을 의심하던 한아는 얼마 지나지 않아 경민의 모습을 하고 있는 존재가 2만 광년을 여행해 한아를 보러 온 외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자신의 몸 일부로 만든 망원경을 통해 지구에 사는 한아를 발견하게 된 이 외계인은 한아의 남자친구인 경민과 거래해 자신의 우주 자유 이용권을 경민에게 넘겨주고 한아를 만나기 위해 큰 빚을 지면서까지 지구로 날아온 것이다.

줄거리를 쓰면서도 요약된 이 문장들이 사실 이 책은 너무나 별개인 것처럼 느껴졌다. <지구에서 한아뿐>은 단순히 지구인을 사랑하게 된 외계인의 사랑을 묘사한 책이라고 보기 어렵다.

SF적 소재 또한 스토리를 이끌고 나가는 주된 요인이 아니다. 오히려 책을 읽다 보면 '그저 그래야만 했다'라는 식의 주인공들의 반응이 독자들로 하여금 책 속에 주어진 상황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만든다.

또한 외계인이라는 구성을 빼면 이 소설은 지극히 현재의 모습을 담은 사실주의적 모양새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소설 속에서 드러난 SF적 특징은 작가의 간결하고 군더더기 없는 문체 속에서 사실주의적인 묘사와 이상적으로 조합된다.

정세랑 작가는 한 인터뷰를 통해 '독서에서 쾌감을 중시하는 편이고 쓸 때도 그런 즐거움을 추구하기 때문에 빨리 읽히는 '페이지 터너'를 쓰고 싶다'고 말했다. 그런 면에서 <지구에서 한아뿐>은 로맨스 소설로서의 낭만과 호기심을 유지함으로 독자들이 소설 속 상황에 빠르게 몰입할 수 있게 만든다. 동시에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다정함을 두른 채 사랑이 무엇인지,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는 점에서 색다른 의미를 지닌다.

그 모든 과정이 자연스러울 수 있는 것은 작가가 소설 속에 마련해 둔 여러 가지 장치들 덕분인데, <지구에서 한아뿐>은 로맨스 소설이면서도 환경주의적 작품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작가는 소설 속 외계인의 무한하고도 우주적인 사랑을 받는 한아를 묘사함에 있어 외적인 부분에 대한 묘사를 전혀 하지 않는다. 다만 한아가 가지고 있는 지구에서, 혹은 우주에서의 역할과 위치, 혹은 인간으로서의 가치에 대해서 더 중점적으로 다룰 뿐이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마치 우주와 지구, 그 환경 속에 살아가는 생명에 대한 존중과 인식을 다루는 과정에서 파생된 사랑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외계인 경민이 한아를 사랑하게 된 계기에 대한 묘사는 그 점을 명확하게 드러내 준다.

▲ <지구에서 한아뿐> 181쪽.
▲ <지구에서 한아뿐> 181쪽.

"어찌 되었건 내가 본 너는 엄청나게 일관된 사람으로, 혼자 엔트로피와 싸우고 있는 거 같았어. 파괴적인 종족으로 태어났지만, 그 본능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지. 너는 비 오는 날 보도블록에 올라온 지렁이를 조심히 화단으로 옮겨주고,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고래를 형제자매로 생각했어. 땅 위의 작은 생물과 물속의 커다란 생물까지 너와 이어지지 않은 개체는 없다는 걸, 넌 우주를 모르고 지구 위에서도 아주 좁은 곳에 머물고 있었는데도 이해하고 있었어. 나는 너의 그 선험적 이해를 이해할 수 없었어. 인간이 인간과 인간 아닌 모든 것들을 끊임없이 죽이고 또 죽이는 이 끔찍한 행성에서, 어떻게 전체의 특성을 닮지 않는 걸까. 너는 우주를 전혀 모르는데, 어떻게 우주를 넘어서는 걸까."

-<지구에서 한아뿐> 중에서

지구에서 하나뿐인 '한아'는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들을 지키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런 진심이, 진정성이 온 우주를 감동시키고 한 행성을 감동시키기까지 한다.

언제부터 우리는 '나를 중심으로, 나를 최우선으로' 하는 이론에 따라 움직이게 되었을까.

<지구에서 한아뿐>을 통해 때로는 우리에게 주어진 자리에 대해 고민하고 자연스러운 것을 보다 다정하게 받아들이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렇다면 이 문장처럼 인생을 보다 긍정적으로, 올바르게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감히 생각해본다.

'흔하지 않지만 어떤 사랑은 항상성을 가지고, 요동치지 않고, 요철도 없이 랄랄라 하고 계속되기도 한다.'

-<지구에서 한아뿐> 중에서

※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