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막집 할머니 넉넉한 인심
굶주린 배 채운 불교 화공
힘들 때 찾아달라며 떠나
손자 아프자 찾아간 할머니
불두화로 핀 화공 유언따라
꽃 우려 먹이자 병세 회복

어느 부둣가에 할머니가 혼자서 주막을 열어 장사를 하고 있었어요.

오늘 아침도 할머니는 평소와 다름없이 주막 문을 열고 손님을 기다렸어요. 할머니의 얼굴에는 장사를 하는 사람같지 않게 항상 온화한 웃음이 평화롭게 흘렀어요.

할머니는 식탁을 깨끗이 닦고 손님을 기다렸어요.

그때였어요. 허름한 누더기 옷을 걸친 할아버지가 문을 지긋이 열고 들어섰어요. 할아버지는 주막 안을 두리번거리더니 한쪽 구석에 힘없이 앉았어요.

"먹을 것을 좀 주십시오."

할머니는 그 할아버지의 행색을 살피더니 얼굴에 웃음을 빙그레 띠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 한 그릇, 밥, 그리고 막걸리 한 잔까지 식탁에 곁들여 올렸어요.

할아버지는 그 음식을 쫓기는 사람처럼 허겁지겁 먹었어요. 며칠을 굶은 것 같은 허기를 채우듯 밥 한 그릇, 국 한 그릇, 그리고 탁주 한 사발을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이 비웠어요.

할아버지는 음식을 먹고는 손으로 뒷머리를 긁적이며 음식 준비를 하는 할머니를 향해 말했어요.

"저기요. 저- 돈이 없어서 무엇이라도 일을 해드리면 될까요?"

할머니는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들고 할아버지를 바라보았어요. 초라한 옷에 몸을 며칠 동안 씻지 않았는지 걸인 같았어요.

"글쎄요. 한 가지 일이 있네요."

"무슨 일인가요? "

할머니의 얼굴이 한 송이 커다란 꽃으로 피어나듯이 웃음이 가득히 흐르더니 가볍게 입을 열었어요.

"하하하. 그냥 가시구려. 들어오실 때 이미…."

"허?…."

할아버지는 고개를 숙이고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기더니 잠시 후, 고개를 들고 잠잠히 흐르는 개울물 같은 목소리로 말했어요.

"이곳에 와서 참으로 따듯한 부처님의 사랑에 젖어 갑니다. 저는 이곳저곳 다니며 절간의 벽에 부처님의 사랑을 그림으로 그리는 화공입니다. 가진 것이라곤 저의 몸에 지닌 붓 한 자루밖에 없습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솔직한 말을 듣자, 마치 부처님을 대하듯이 할아버지를 향해 두 손을 모아 예를 표했어요.

"할머니, 혹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풀기 어려운 일이 있으면 제가 기거하는 천곡사로 오십시오. 기다리지요."

"천곡사에서 기다리신다고요? 허허허."

세월이 제법 지났어요.

할머니는 하루 빠짐없이 주막 문을 열어 장사를 했어요. 부둣가라서 사람들이 즐겨 찾는 가게였어요. 더구나 할머니의 너그러운 인심 때문에 사람들은 포근한 고향집을 찾는 마음으로 가게를 찾았어요.

▲ 하동 쌍계사 팔영루 앞에 있는 9층석탑과 불두화가 어우러진 모습. /경남도민일보 DB
▲ 하동 쌍계사 팔영루 앞에 있는 9층석탑과 불두화가 어우러진 모습. /경남도민일보 DB

그런 어느 무더운 여름날이었어요.

할머니의 며느리가 숨을 헐떡이며 가게 문을 열고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어요.

"어머님, 큰일났어요. 수병이의 허벅지에 커다란 종기가 나서 아프다고 뒹굴고 있어요. 벌써 며칠 되었어요."

"뭐라고? 우리 귀한 손자 수병이가 종기로 고생을 해. 내가 장사하느라고 손자에게 소홀했구나."

할머니는 집으로 달려가 종기가 나 퉁퉁 부은 손자의 허벅지를 손으로 만지며 어쩔 줄을 몰랐어요.

"이를 어쩌나? 이를 어째? 우리 귀한 손주를?"

할머니는 사랑하는 손주를 가슴에 안고 한숨을 내쉬며 걱정을 하였어요. 주변에 마땅한 의원도 없었어요. 그때, 할머니 머릿속에 빛살처럼 스쳐가는 생각이 떠올랐어요.

"그렇지. 그날 그 할아버지가 세상을 살면서 풀기 어려운 일이 있으면 천곡사로 오라고 했지."

할머니는 손자 수병이를 등에 업고 숨을 헐떡거리며 마을 뒷산 중턱에 있는 천곡사로 바쁘게 걸어갔어요.

할머니가 천곡사 뜰에 닿자, 할머니 얼굴에는 땀이 비 오듯 하고, 온몸이 땀에 흠뻑 젖었어요.

할머니는 천곡사 대웅전에 가서 부처님에게 절을 크게 하고 그 절의 주지 스님에게 물었어요.

"스님? 이 절에 그림을 그리는 화공 할아버지가 계시는지요?"

할머니의 그 말에 스님의 눈이 동그래지며 놀라는 표정이 되더니 힘없이 말했어요.

"그 할아버지는 작년에 돌아가셨어요. 어떻게 찾으시는지요?"

"예? 돌아가셨다고요?"

할머니는 숨을 헐떡거리며 온 몸에 줄줄 흐르는 땀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덜퍼덕 주저앉았어요. 그때 스님이 그런 할머니에게 조용한 말 한마디를 했어요.

"보살님, 그 할아버지가 그림을 그리면서 종종 이런 말을 했어요. '한 사람의 따듯한 정이 꽃으로 핀다면 참 좋을 거야.' 그래서인지 그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분의 무덤가에 저 꽃이 피기에 대웅전 화단에 옮겨 심었지요?"

할머니는 벌떡 일어나 대웅전 앞 화단에 함초롬히 피어있는 하얀 꽃송이를 보았어요.

할머니는 그 꽃송이를 보는 순간, 그 꽃송이에서 할아버지가 환히 웃는 모습을 보았어요. 그 꽃에서 참으로 이상한 속삭임 같은 것이 할머니의 귓가에 웅얼거렸어요.

"할머니, 잘 오셨네요. 손자 수병이 종기가 심하지요? 내 하얀 이 꽃송이를 따다가 따끈한 물에 우려서 종기에 정성껏 바르고 그물을 마시게 하십시오."

할머니의 귀에 화공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꽃향기처럼 부드럽게 들려오자, 할머니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렀어요. 할머니는 떨려오는 손길로 그 꽃송이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며 한 송이를 꺾었어요.

"어쩌면 꽃송이가 이렇게도 할아버지 모습처럼 부드럽고 따스할까?" 할머니는 그 꽃송이를 가슴에 소중하게 품고 집으로 돌아왔어요. 하얀 사발에 따스한 물을 무어 그 물에다 천곡사 화단에서 꺾어온 꽃을 조심스럽게 담가 우렸어요. 꽃물이 하얀 사발에 우러 나오는 동안, 할머니는 하얀 사발 속의 꽃송이를 보고 두 손을 모아 절을 했어요. 그 하얀 사발 고운 꽃물 위에 화공 할아버지가 벙긋이 웃고 있었어요.

할머니는 밤늦게까지 그 꽃물을 정성스럽게 손자 수병이 아픈 곳에 바르고, 그 꽃물을 조금씩 마시게 했어요.

다음 날, 아침이 되었어요.

할머니, 며느리, 아들이 수병이의 아팠던 종기를 보고 놀라서 고함을 질렀어요.

"와! 신기하다. 그 아프던 종기가 깨끗이 나았다."

할머니는 씻은 듯이 깨끗이 나은 손자의 허벅지를 보자, 벌떡 일어나서 떨리는 두 손을 모아 천곡사를 향하여 절을 수없이 했어요. 할머니의 얼굴은 천곡사 화단에 벙그레 웃고 있는 꽃송이로 피어올랐어요. 그것은 할아버지의 웃고 있는 얼굴이지요.

우리는 그 꽃을 불두화(佛頭花)라고 불러요. 부처님의 자비로운 모습이란 뜻이겠지요.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친절에서 무엇을 느꼈을까요?

불두화의 꽃말은 '제행무상'이라고 해요. 움직이는 모든 것은 항상 그렇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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