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양덕초교·경남대 창단
마산상고·마산고 다크호스 두각
경남대 1989년 전국체전서 정상
마산고 1994년 화랑대기 우승
경남대 대학선수권 준우승 등
선수수급 어려움 딛고 전성기

프로야구 열기가 한창이던 1980∼1990년대, 아마야구도 나름의 존재감을 뽐내며 그 명맥을 이어갔다. 특히 이 시기 우리 지역팀은 각종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며 깊은 인상을 남겼다.

-안정세 접어든 아마야구-

1980년대 초 마산지역 아마야구는 '부활과 창단'으로 정의할 수 있다.

'부활'은 고교야구팀에서 비롯됐다. 이 시기 마산상고(현 마산용마고)는 1980년 전국대회 준우승·4강 성적을 거두며 명문 재도약 가능성을 알렸고, 1974년 해체 아픔을 겪었던 마산고는 6년 만에 부활했다. 창단 열기도 대단했다. 1981년 마산양덕초 야구부가 창단하고 이듬해 경남대 야구부가 첫발을 내디딘 덕분인데, 이로써 마산지역 초·중·고·대 연계 육성 기틀도 확실히 잡혔다.

1980년대 초반을 넘어서면서부터는 부활·창단 성과도 하나둘 나왔다.

일찌감치 꿈틀댔던 마산상고는 1982년 7월 개막한 '봉황기 고교야구대회'에서 8강에 오르며 상승세를 이어갔다. 비록 4강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마산상고는 이 대회 8강에서 '뒷심'을 뽐내며 지역 야구팬을 들끓게 하기도 했다. 재일동포 팀과 붙은 8강에서 마산상고는 7회까지 0-3으로 끌려갔다. 추격에 나선 마산상고는 8회 5번 조영천 적시타와 상대 실책 등으로 2점을 만회하고 나서 9회 초 3번 김형섭 희생플라이로 3-3 동점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9회 말 터진 상대 홍수영의 중전 적시타로 마산상고는 결국 3-4로 패했으나, 좋은 경기력으로 명문 부활을 확실히 알렸다.

1982년 4강 진출에 실패했던 마산상고는 4년 뒤 '제16회 봉황대기 쟁탈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그 한을 풀었다. 이 대회에서 마산상고는 예선에서 군산상고를 격침한 데 이어 강호 인천고와 전년도 준우승팀 광주상고를 차례로 꺾고 4강에 진출, 지역민 관심을 모았다. 당시 마산시내 주점과 다방가는 온통 마산상고 야구부 이야기가 만발했다는 기록이 남을 정도. 4강 상대팀인 광주 진흥고 응원단이 200명 정도였던 데 비해 마산에서는 약 1000명이 경기장을 찾았다는 점도 그 열기를 짐작하게 한다. 경기에서 마산상고는 2-2로 팽팽하게 맞서던 9회 말 안타·희생번트로 내준 1사 2루 위기에서 상대 이재훈에게 끝내기 2루타를 맞으며 2-3으로 석패했다. 이 같은 결과를 두고 마산 시민은 '날씨 관계로 4강전이 4차례나 연기됐기 때문'이라며 패배 원인을 찾기도 했다.

이 대회 이후 마산상고는 한동안 염원했던 우승컵은 들지 못했지만 지역 아마야구 맥을 꿋꿋하게 지켰다.

재창단한 마산고도 전국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982년 마산상고와 함께 '봉황기 대회' 8강에 올랐던 마산고는 2년 뒤인 1984년 '제18회 대통령배쟁탈 고교야구대회'에서 4강에 진출하며 마산 고교야구 자존심을 세웠다. 이 대회에서 마산고는 경남고에 6-9로 패하며 결승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중견수 박재수가 타격상(타율 0.529)에 이름을 올리는 등 매서운 방망이를 뽐냈다.

1985년 전준호·박재수 등을 앞세워 '대붕기' 8강, '39회 황금사자기' 4강에 진출하며 성장한 마산고는 1987년·1989년 '대통령배 대회'에서 또다시 8강에 오르며 '신야구 명문'으로의 입지를 다졌다.

1980년대 지역 라이벌 마산상고와 마산고가 제대로 맞닥뜨린 일도 있었다. 1986년 9월 '황금사자기쟁탈 고교야구 경남 예선' 결승 때다. 이 경기에서 두 팀은 8회까지 8-8로 팽팽하게 맞섰다. 승패는 의외의 사건(?)으로 갈렸다. 9회 말 마산고 공격 때 나온 심판 판정에 마산상고가 불복한 게 발단인데 심판은 곧바로 몰수게임을 선언, 본선진출권을 마산고에 안겼다.

이 시기 중등부에서는 마산중이 우위를 보였다. 마산중은 1985년 '제28회 체육부장관기쟁탈 전국중학야구대회'에서 광주 충장중을 18-5로 꺾고 우승하였다. 대회에서 마산중 투수 김경환은 최우수선수상을, 김철웅은 우수투수상을 받았다. 당대 마산 중등 야구는 '한일야구 교류'에도 앞장섰다. 1986년 8월 마산종합운동장에서 열린 '한일중학생 친선야구 교환경기'가 한 예다. 경기에는 마산중·마산동중에서 선발된 한국 측 2개 팀과 일본 후쿠오카현 선발 2개 팀이 경기를 펼쳤다.

▲ 1989년 '제70회 전국체전'에서 단국대를 누르고 사상 첫 전국대회 우승을 차지한 경남대 야구부.  /경남도민일보 DB
▲ 1989년 '제70회 전국체전'에서 단국대를 누르고 사상 첫 전국대회 우승을 차지한 경남대 야구부. /경남도민일보 DB

1980년대 초 창단 이후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하던 경남대 야구부는 1980년대 중·후반 들어 본궤도에 올랐다. 1987년 '제37회 백호기쟁탈 종합야구선수권대회'에서 8강에 오르며 달라진 모습을 보인 경남대는 1989년 '제70회 전국체전'에서 사상 첫 전국대회 우승을 차지했다. 단국대와 겨뤘던 결승에서 경남대는 3회까지 0-6, 8회까지 6-10으로 끌려갔으나 9회 말 극적으로 동점을 내더니 결국 추첨승 하였다. 경남대 야구부 선전으로 그해 체전에서 경남은 부산을 누르고 '종합 3위' 영광을 안았다.

-새 역사, 그리고 부흥-

1990년대 마산지역 아마야구는 흥행에선 프로야구에 상당 부분 지분을 뺏겼으나 성적에선 부흥을 맞았다.

고교야구에서는 마산고가 부흥에 앞장섰다. 1980년대 후반 꾸준히 전력을 향상해가던 마산고는 1990년 5월 열린 '제24회 대통령배 고교야구대회'에서 결승에 진출했다. 이 대회 기간 마산 시민 관심도 대단했다. 1986년 마산상고의 '봉황대기' 4강 진출 이후 오랜만에 고향 팀 활약을 보게 된 마산 시민은 마산고 경기가 있는 날이면 서울 목동구장·인천공설운동장에 몰려들어 선수 사기를 드높였다. 급기야 마산고가 결승에 오르자 관심은 폭발했다. 마산고 동문은 저녁 비행기로, 재학생 1200명은 버스를 타고 서울로 가 결승 경기를 관람했다. 비록 결승에서 마산고는 충암고에 5-10으로 패하며 우승컵은 들지 못했지만 마산역 광장에서는 성대한 환영식을 열어 마산고 야구부를 치하했다.

▲ 마산고는 1994년 '제46회 화랑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 결승에서 5회 말 역전 만루홈런을 터트린 채종범(10번)의 활약을 앞세워 경남상고를 7-6으로 누르고 창단 이후 전국대회 첫 우승을 맛봤다.  /경남도민일보 DB
▲ 마산고는 1994년 '제46회 화랑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 결승에서 5회 말 역전 만루홈런을 터트린 채종범(10번)의 활약을 앞세워 경남상고를 7-6으로 누르고 창단 이후 전국대회 첫 우승을 맛봤다. /경남도민일보 DB
▲ 마산고는 1994년 '제46회 화랑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 결승에서 5회 말 역전 만루홈런을 터트린 채종범의 활약을 앞세워 경남상고를 7-6으로 누르고 창단 이후 전국대회 첫 우승을 맛봤다. 마산고 교정에서 열린 우승 환영식.  /경남도민일보 DB
▲ 마산고는 1994년 '제46회 화랑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 결승에서 5회 말 역전 만루홈런을 터트린 채종범의 활약을 앞세워 경남상고를 7-6으로 누르고 창단 이후 전국대회 첫 우승을 맛봤다. 마산고 교정에서 열린 우승 환영식. /경남도민일보 DB

마산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우승 한'도 풀었다. 1994년 열린 '제46회 화랑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 결승에서 마산고는 경남상고를 7-6으로 꺾으며 창단 52년 만에 전국대회 첫 우승을 맛봤다. 특히 마산고는 결승 만루 홈런을 포함, 2경기 연속 홈런을 기록한 채종범이 대회 MVP에 뽑히고 투수 박병구가 타격상(타율 0.625)·우수투수상 2관왕에 오르며 기쁨을 키웠다.

마산고는 이 여세를 몰아 1995년 '49회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도 결승에 올랐다. 여기서 마산고는 덕수상고에 1-3으로 패했지만 고교야구계에 강렬한 인상을 심었다. 이듬해 마산고는 '48회 화랑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또 한 번 우승을 차지하고, '50회 황금사자기 대회'에서도 8강에 오르며 창단 후 최고 전성기를 보냈다.

이 시기 마산상고는 번번이 우승 문턱에서 미끄러졌던 1980년대 상황을 되풀이했다. 1993년 '대붕기 대회'에서 신일고에 0-8로 패하며 준우승을 차지한 건 시작에 불과했다. 이후 마산상고는 1997년 '전국체전'에서 준우승 한 데 이어, 1999년 '무등기'에서도 3위에 머물며 '준우승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럼에도 마산상고는 '1993년 고교야구 첫 만루포 기록'을 변진석이 세우고 프로야구에 모교 출신 선수가 하나둘 얼굴을 비치는 등 개개인 활약으로 존재감을 뽐냈다.

1989년 '전국체전' 우승으로 전성기를 맞았던 경남대 야구는 1990년대에도 상승세를 이어갔다. 1990년대 초 전국 4강권을 형성하던 경남대는 1993년 10월 '제48회 전국대학야구선수권대회' 준우승으로 새 역사를 썼다. 이 대회 4강에서 경남대는 강호 경희대를 4-3으로 꺾고 결승행 티켓을 거머쥐었다. 4강전에서 경남대는 경희대보다 1개 적은 4안타에 그쳤으나 선발 조용범과 불펜 곽병찬 호투에 힘입어 결승행을 확정했다.

대회 결승 상대는 1988년 창단 이후 처음으로 전국대회 결승에 오른 홍익대였다. 1회 경남대는 김동주의 홈런으로 선취점을 얻었다. 하지만 1회 말 곧바로 동점을 내준 경남대는 3회 말 터진 홍익대 김경렬 홈런으로 역전까지 허용했다. 이후 경남대는 상대 선발 최상덕의 빠른 공과 내·외야진의 빼어난 수비에 묶이며 추가 득점에 실패, 1-10으로 패했다. 비록 준우승에 그쳤으나 1980년대 중·후반부터 이어진 경남대 활약은 칭찬받아 마땅했다. 이를 두고 <마산시 체육사>는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지방대학으로서 스카우트상의 어려움과 연습상대 부족 등 온갖 악조건 가운데서도 이처럼 정상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감독·선수들의 피나는 노력 덕분이었다.'

한편 초등부에서는 양덕초 야구부가 1998년 '전국소년체전' 금메달을 땄다. 이후 양덕초는 2014년에는 준우승, 2016·2018년에 각각 3위를 차지한 데 이어 2019년 21년 만에 다시 우승하며 소년체전과 인연을 이어갔다.

<참고 문헌> △<마산시 체육사>, 조호연 책임 집필, 마산시, 2004 △경남야구협회 소장 자료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경남도민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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