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친구가 자신이 ‘꼰대’가 된 거 같다고 토로했다. 자신도 모르게 후배들에게 ‘내가 해봐서 아는데’로 시작하는 훈계를 늘어놓다가 속으로 ‘아, 이게 아닌데’ 했단다. 이왕이면 괜찮은 중년, 나아가 멋진 할머니가 되고 싶은데 현실은 꼰대 되지 않기라니. 로망과 현실의 갭은 하늘과 땅 차이다. 

잘 늙어가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연극 <황야의 무법자>에서는 노인을 ‘과거를 풀처럼 뜯어 먹고 사는 늙은이’라고 비난하는 장면이 나온다. 과거의 영광과 상처에 함몰돼 현재를 흡수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뜻이다. 대부분 사람은 살아왔던 관성대로, 습관대로 남은 시간을 살아간다. 새로운 세대의 경험에 대해서 자신의 경험치로만 응답하게 되는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다. 그래서 잘 늙어가는 것에는 오랜 연습이 필요하다. 

내게는 닮고 싶은 어른의 모델이 있다. 대학 졸업 후, 도넛 가게에서 알바를 할 때 알게 된 할아버지 점주님. 바쁜 출근 시간, 손님 줄이 길어질 때도 점주님은 여유로웠다. 손님들에게 농담까지 곁들여가며 느긋하게 주문을 받다가 뒤돌아서 말했다.

“바쁜 건 저놈들 사정이고 우린 우리 속도대로 일하면 돼.”

자신의 속도로 인생을 사는 것, 지금도 힘이 되는 말이다. 당시 점주님은 지하철을 공짜로 타는 ‘지공’에 접어드는 나이였다. 젊은 시절 잘나갔던 친구들도 모두 백수가 되고, 그중 가장 부러움을 사는 사람은 최근에 산불관리원에 취직한 친구요, 그다음은 아침마다 가게 문을 여는 바로 자신이라고 했다. 노인이 되어서도 일을 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점주님의 뿌듯한 얼굴을 보며 짐작할 수 있었다. 

때로는 좋은 시를 외워 읊고, 단체 여행 가서 히트한 춤을 추시기도 했다. 더 눈이 나빠지기 전에 도서관에 가서 <한강>과 <로마인이야기>를 읽었다며 ‘작가가 되겠다는 넌 읽어봤니?’ 타박을 하시기도 했다. 내가 그동안 알고 겪었던 노인 중에 가장 힙한 사람이었다. 나이를 훈장으로 생각하지 않고 항상 생기 있게, 늘 좋은 것을 배우려는 자세는 지금도 싱그럽게 다가온다. 

하지만 동방예의지국에서 태어난 우리에게 노년의 풍경은 다소 고정적이다. 어릴 적부터 우리는 노인을 함께 살아갈 사회구성원 이전에 공경의 대상으로 교육 받아왔기 때문일까. 노인을 생각하면 쉽게 떠오르는 이미지들 또한 수동적이고 부정적이다. 각종 미디어에서도 마찬가지다.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에서 엄마 친구들의 이야기를 써보라는 말에 30대 작가 완은 이렇게 대답한다.

“누가 늙은 꼰대 이야기를 돈내고 보고 싶어해?”

공감이 가면서도 씁쓸하다. 현실을 반영하듯 영화, 드라마, 소설 속 주인공은 대개 젊은이인 경우가 많다. 노인의 서사는 어쩔 수 없이 곁들이는 수준에서 그치기도 한다. 숱한 서사 속에서 노인은 주체가 되기 힘들다. 백세시대가 도래했지만 노년의 삶이 깜깜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노년에 대한 이야기가 부족하기 때문은 아닐까. 우리에게 노년은 삶보다는 숙제로 다가온다. 노인 뒤에 으레 ‘문제’라는 단어가 붙듯이. 

노년은 별 일이 없다면, 모두가 이르는 곳이다. 우리 사회는 노인문제 이전에 노인의 삶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인내가 필요하다. 잘 늙어가는 것만큼 어려운 것이 세상에 필요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나는 이제 궁금하다. 노인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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