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앞두고 오열하는 장면에
'브라질풍의 바흐 5번 중 아리아'
세상 홀로 남은 듯한 심경 표현

과한 친절이 오히려 해가 될 때가 있다. 많은 영화들이 관객을 위한다며 만들어낸 장황한 상황 설명으로 장르가 가져야 할 긴장감을 떨어뜨리곤 하는 것이다. SF장르의 영화를 보러 온 관객들은 이미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장면들을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그렇듯 슬픈 사랑 이야기를 감상하러 온 이들은 조그마한 감정이입에도 눈물을 흘릴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지나친 설정과 판타지급 우연들은 오히려 실소를 자아낼 뿐이며 무엇보다 '이래도 안 울어?' 하며 먼저 오열하는 주인공들을 볼 때면 그 민망함에 나오던 눈물마저 '쏙' 하고 사라진다.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는 시 같은 영화다. 언어를 펼치지 않고 함축함으로 오히려 그 의미를 더욱 확대시키는 마법 같은 문학이 시이듯 이 영화는 대사를 자제하고 클로즈업과 같은 화면적 기교 또한 아끼지만 대사 하나, 장면 하나가 모두 큰 의미를 지닌 채 다가온다. 영화가 흘러가는데 있어 중요하지 않은 설정들은 모두 지워냈기에 더욱 깊으며, 소소한 듯 현실적이기에 주는 슬픔이 날리지 않고 꾹꾹 다져져 큰 여운을 남기는 것이다. 소설을 읽고 줄거리를 써내려 가긴 쉽다. 하지만 압축된 시를 읽고 그것을 다시 간결화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장면.  /스틸컷
▲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장면. /스틸컷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어느 조그만 도시의 소박한 동네 사진관, 초원사진관. 그곳엔 아버지가 운용하던 이곳을 이어 받아 운영하는 30대 남자 정원(한석규)이 있다. 그리고 구청 주차단속 요원 다림(심은하), 사진현상을 위하여 그곳을 자주 찾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가까워지는 두 사람의 모습이 풋풋하다.

그러던 어느 날, 병원을 찾은 정원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몇 번이고 병원을 찾았고 그 흔한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라는 의사의 멘트도 없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관객은 그의 죽음이 다가옴을 느낀다. 이제 친구를 찾아가 평소 즐기지 않던 술도 한잔 기울이며 조용히 죽음을 준비하는 정원. 하지만 이런 사실을 알리 없는 다림은 그의 마음을 열기 위해 노력하지만 이제 곧 세상을 떠날 그는 쉽게 자리를 내어 줄 수도, 그렇다고 멀리 쫓아버릴 수도 없다.

아무 일 없는 듯 삶을 이어가는 한편 조금씩 그 삶을 정리해 나가는 정원의 표정은 너무나 담담하기에 슬프고 다림을 볼 때마다 지어지는 그의 웃음은 애달프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긴 시간이 필요한 사랑을 시작한 둘. 이젠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조용히 삶을 정리해 가는 정원에게 그녀는 놓기 힘든 마지막 행복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녀는 이제 떠나 보내야 할 추억이며 오랜 친구들과도 역시 안녕을 고하듯 함께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끝까지 마음에 걸리는 홀로 남겨질 아버지. 몇 번을 알려 드린 TV작동법을 익히지 못하는 아버지에게 화가 나고 타박하지만 아버지를 위하여 꼼꼼히 사용법을 적어나가던 모습은 죽음을 준비하는 자를 묘사한 서러운 명 장면이다.

이러한 날들이 흐르다 총총거리며 찾아간 사진관의 문이 닫혀 있는 것을 확인하는 다림, 이유도 알 수 없이 굳게 닫혀버린 사진관을 쓸쓸히 돌아서는 다림의 표정은 처음엔 의아하다 곧 그의 계속되는 부재에 당혹함과 슬픔으로 바뀐다. 그러다 결국 돌멩이를 날려 유리창을 깨곤 씩씩거리지만 아마도 이렇게라도 그를 불러내고픈 그녀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이제 오랜 병원생활을 마치고 사진관으로 돌아온 정원. 그동안 쌓인 고지서들을 확인하던 그는 그 속에 섞인 다림의 편지를 발견한다.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읽어 내려가는 정원의 얼굴에 웃음이 번진다. 이제 정성스럽게 쓴 답장을 들고서 그녀를 찾아간 정원. 카페에 앉아 창 밖으로 보이는 다림을 눈으로 좇으며 쓰다듬는 그의 표정이 간절하지만 끝내 그녀를 불러 세우지 못한다. 그리고 가져 간 편지는 말 그대로 부치지 않은 편지가 되고 마는 것이다. 이제 사진관으로 돌아 온 그는 그를 찍는다. 그 사진은 그의 영정사진이 되고 그는 희미하게 웃고 있다.(이 사진은 가수 고 김광석의 웃고 있는 영정사진을 모티브로 하였다 한다) "내 기억 속에 무수한 사진들처럼 사랑도 언젠가는 추억으로 그친다는 걸 난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만은 추억이 되질 않았습니다.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게 해준 당신께 고맙단 말을 남깁니다."

▲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장면.  /스틸컷
▲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장면. /스틸컷

◇브라질풍의 바흐

죽음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주인공의 설움이 결국 폭발하고 마는 두 장면이 있다. 먼저 친구와 술을 마시다 무슨 연유에선지 경찰서에 잡혀 온 정원이 조용히 머리를 감싸 쥐고 있다 갑자기 절규하던 장면, 그리고 죽음을 준비하던 어느 날, 덮어 쓴 이불 속에서 오열하던 장면이 그렇다. 그리고 이토록 서럽게 새어 나오던 그의 울음 소리와 함께 흐르던 음악이 있으니 바로 세계적 명성의 브라질 작곡가 '에이토르 빌라 로보스(Heitor Villa-lobos)'의 '브라질풍의 바흐' 중 제5번의 1곡 '아리아(칸틸레나)'다.

어려서부터 많은 악기를 배운 '빌라 로보스'는 독학으로 서양음악을 익히며 탐구하였는데 바흐를 특별히 사랑하고 존경하여 바흐야말로 세계음악의 공통언어라는 말을 남기기도 한다. 또한 그는 브라질 민속음악 연구에도 큰 공헌을 남기는데 젊은 시절부터 브라질 전역에 흩어져 있는 민속음악을 채집하였으며 국립음악원에 들어간 이후에도 그 노력은 멈추지 않고 더욱 확대된다. 이후 1920년대 후반을 파리에서 보내고 돌아온 그는 평소 존경하던 바흐의 대위법적 기법과 그동안 연구해 온 활기로 가득한 브라질의 민속음악의 선율을 융합, '브라질풍의 바흐'를 작곡하게 되며 브라질 음악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얻게 된다. 이 작품의 특징 중 하나는 바흐가 활동한 바로크를 연상시키는 제목 프렐류드, 푸가, 토카타, 아리아 등과 함께 단사, 초로스 등의 브라질 민속음악 장르의 제목이 함께 병존한다는 것이다.

영화 속에 흐르던 가장 유명하다 할 제5번 역시 '아리아'와 '단사'로 구성되어 있다. 총 9곡으로 이루어진 15년이란 긴 시간의 결실 '브라질풍의 바흐'는 각 곡마다 편성이 다른 것이 또 하나의 특징이다. 이 중 제5번은 8대의 첼로와 소프라노를 위한 곡으로 한 종류의 악기를 대거 투입한 모험적 시도라 할 수 있으며 첼로의 피치카토(현을 손가락으로 뜯어 내는 음)의 도입부가 지나면 몽롱한 듯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하지만 가사는 없다(보칼리제). 선율은 유려하고 리듬은 육감적이며 또한 아련하며 이국적이다.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 익숙한 것들과 멀리 떠나 홀로 남겨진다면 이 선율이 나를 감쌀 것 같은 느낌. 이와 유사한 느낌의 곡을 꼽자면 영화 <흑인 오르페>의 주제곡이 떠오른다. 비교하여 감상해 보는 즐거움도 가져보시길 바란다.

▲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장면.  /스틸컷
▲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장면. /스틸컷

◇여백과 이별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가 가지는 미학은 감정적 강요가 없다는 것에 있다. 내가 하고픈 이야기를 다 한 듯한 어느 번역가의 글이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자랑하지 않고, 충고하지 않고, 강요하지 않는 그 침묵에 더 없이 큰 위로를 받는다. 대사도 적지만 이렇게 여백이 많은 작품도 드물다. 인물이 다 빠진 배경이 덩그러니 남아 한참 동안 나를 쳐다본다. 이 정도면 오히려 영화에 내가 말을 걸고 싶을 정도다."

이 영화는 이별에 관한 이야기다. 두 남녀의 이별이 애틋하지만 덤덤한 듯 절절한 것은 남자들의 이별이다. 이불 속에서 흐느껴 울 때 방문 밖에 언뜻 비치던 아버지의 그림자는 어떠한 위로의 말도 없지만 피를 토하는 슬픔이다. 평소와 다른 행동의 정원이 취한 김에 귓속말로 자신이 곧 죽는다는 말을 했을 때 술 먹고 싶어 별소릴 다한다며 '그래 한잔 더해 인마' 하며 웃던 친구는 제발, 제발 농담이기를 빌었을 것이고 그래서 더 과장되게 웃었을 것이다. 이런 친구를 '知音(지음)'이라고 한다던가? 이렇듯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해 보지만 친구는 느끼고 묻는다, 무슨 일 있냐고. 아무 일도 없다 우겨봐야 소용없다. 벼랑 끝에 섰을 때 친구가 이렇게 건네 온다면 털어 놓을 수밖에 없다. 그냥 그저 고마운 그 말.

"말해 봐."

 

※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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