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 사세 확장하던 한일합섬
1983년 '제7 구단'창단 신청
1989년엔 전북 쌍방울과 경합
정치권 입김 등에 시도 좌절

지난 2011년 창원 연고 프로 팀이 'NC다이노스' 이름으로 창단했다. '지역 연고팀 창단' 움직임은 이미 1980년대 여러 차례 있었다. 마산 향토기업 '한일합섬'이 그 주체였다.

1982년, 김중원 한일합섬 회장은 창업자인 아버지 김한수 회장에 이어 기업 총수 자리에 올랐다. 그는 경남고 학창 시절 야구 선수로 활동했다. 그룹을 이끌던 때에도 종종 취미로 야구를 했다. 한일합섬은 1980년대 한창 사세를 확장해 나가던 중이었다. 프로야구단은 그 매개로 삼기에 매력적인 카드였다.

프로야구 출범 이듬해인 1983년 6월, 한일합섬은 KBO(한국야구위원회)에 프로야구 창단 허가 신청서를 제출했다. 마산·창원·울산을 지역 연고로 하는 '제7 구단'을 창단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무렵 프로야구 창단 뜻을 나타낸 기업은 한국화약그룹·동아건설·태평양·한양·금성사·국제상사·농심·한국야쿠르트·쌍방울로 모두 10개에 이르렀다.

그해 10월 체육부는 프로야구단을 1개 더 늘리겠다는 견해를 나타냈다. 다만 연고지는 대전·충남·충북을 전제로 했다. OB베어스가 프로 출범 당시 대전·충청에 둥지를 틀었다가, 1985년 서울로 이전할 예정이었다. 그 빈자리를 새 구단으로 채우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한국화약그룹(현 한화)·동아건설 '2파전'으로 압축됐다. 한국화약은 천안북일고 야구부 창단 주도를 비롯해 충청도 초·중고 야구에 지원을 이어오고 있었다. 김승연 그룹 회장 고향이 충남 천안이기도 했다. 동아건설은 대전 기반 기업활동에서 연결고리를 찾았다.

▲ 마산 향토기업 한일합섬은 1980년대 마산 연고 프로야구단 창단을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번번이 좌절 아픔을 겪어야 했다. 사진은 한일합섬 마산 공장 전경. 오늘날 이곳에는 주상복합아파트 메트로시티가 들어서 있다.  /경남도민일보 DB
▲ 마산 향토기업 한일합섬은 1980년대 마산 연고 프로야구단 창단을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번번이 좌절 아픔을 겪어야 했다. 사진은 한일합섬 마산 공장 전경. 오늘날 이곳에는 주상복합아파트 메트로시티가 들어서 있다. /경남도민일보 DB

1984년 1월, 기존 6개 구단주 회의가 열렸다. 이들은 '신생 구단이 창단 가입금 30억 원 등 4개 조건에 걸쳐 모두 100억 원가량 투자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진입 장벽을 매우 높게 쌓은 것이다. 이에 한국화약·동아건설 모두 발을 빼 버렸다.

1984년 12월, KBO는 다시 한번 제7 구단 창단 접수에 들어갔다. 충청권 연고에 우선권을 주되, 이 지역 신청이 없으면 타지역에도 기회를 주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한국화약을 비롯해 한일합섬·농심이 신청서를 제출했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한국화약이 제7 구단 주인공으로 확정, 1986년 빙그레이글스로 1군 시즌에 합류했다.

한일합섬은 이후에도 마산·창원 연고 팀 창단 끈을 놓지 않았다. 1989년 또 한 번 기회가 찾아왔다. KBO 이사회는 그해 2월 '제8 구단 1990년 창단 계획'에 합의했다. 그리고 구단주 회의가 3월 열렸는데, 이들은 다시 가이드라인을 내놓았다. 주요 내용은 △연간 매출액 5000억 원 이상 기업 △가입금 50억 원 이상 △3만 5000명 수용 가능한 구장 신축이었다.

전북이 먼저 발 빠르게 움직였다. 이 지역 상공인들이 야구단 유치 의사를 공식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그리고 쌍방울·미원이 참여 기업으로 나섰다.

한일합섬 역시 마산을 중심으로 한 경남 연고 팀 신청서를 KBO에 냈다. '경남 마산·창원' '전북 전주·군산' 대결이었다.

야구계는 설왕설래했다. 우선 마산은 높은 야구 열기와 한일합섬 대규모 직원 등 관중 동원에서 우위를 점했다. 그런데 1980년대 중·후반은 지역감정이 극에 달했던 시기다. 경상도는 이미 부산(롯데자이언츠)·대구(삼성라이온즈)가 팀을 두고 있는데, 마산까지 더해지면 3팀이 되는 것이다. 반면 전라도는 광주(해태타이거즈) 하나뿐이었다.

그해 5월로 접어들면서 이상한 기류가 형성됐다. 한일합섬이 야구단 창단 의지를 접은 것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제8 구단'이 결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김동엽이 전북 연고 팀 창단 감독을 맡게 됐다'는 기사까지 흘러나왔다.

7월 8일, 임시 구단주총회가 열려 표결에 들어갔다. 결과는 전북 연고 팀 6표, 경남 연고 팀 1표, 기권 1표였다. 결국 제8 구단은 전북에 돌아가며 쌍방울레이더스(초대 감독 김인식)가 탄생했다.

한일합섬은 특별한 이유 없이 양보하는 형식으로 물러난 것이다. 이에 대해 공식적인 견해를 나타내지도 않았다.

이에 대해 '물밑 정치권 압력'이 있었다는 게 중론이다. 당시 '프로야구 지역연고제'는 스포츠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었다. 정치권과도 밀접히 연결됐다.

당시 정치권 상황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1987년 12월 대선에서 '양 김(김영삼·김대중)'이 갈라지며 노태우 정권이 탄생했다. 1988년 4월 총선에서 '여소야대' 결과가 나왔다. 당시 김대중 총재가 이끌던 평민당은 70석으로 제1 야당이 되었다. 평민당은 특히 광주·전남·전북에서 1석을 제외한 36석을 싹쓸이했다.

▲ 김중원(왼쪽) 한일합섬 회장은 경남고 학창 시절 야구 선수로 활동했다. 그룹 총수 자리에 올라서도 변치 않는 애정을 이어가며 마산 연고 프로야구 팀 창단을 여러 차례 시도한다.  /경남도민일보 DB
▲ 김중원(왼쪽) 한일합섬 회장은 경남고 학창 시절 야구 선수로 활동했다. 그룹 총수 자리에 올라서도 변치 않는 애정을 이어가며 마산 연고 프로야구 팀 창단을 여러 차례 시도한다. /경남도민일보 DB

그런데 노태우 정권 정보기관은 '프로야구 해태(광주)가 평민당 바람에 결정적인 영향을 줬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988년 말 체육부 고위 관계자가 '프로야구 제8 구단 창단'을 처음 언급했다. 그러자 KBO가 신속하게 신생 구단 창단 분위기를 조성했다. 당시 KBO 총재는 여당(민자당) 국회의원인 이웅희 씨였다. 그는 앞서 전두환 정권 시절 청와대 대변인, 문화공보부 장관 등을 역임했다. 전북지역에서는 이례적으로 기업 아닌 상공인들이 먼저 야구단 창단 의지를 나타냈다.

이 과정에서 정치권 평민당이 가장 민감하게 받아들였다. 당시 당 관계자가 김대중 총재에게 한 말에서 그 분위기를 알 수 있다.

"호남 구심은 김대중 총재님과 프로야구 해태입니다. 전북 야구단이 창단되면 구심력 하나가 상실되는 것입니다. 제8 구단 창단이 호남지역을 약화하고 분열하기 위한 정치공작이 아닌지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에 대해 당시 KBO 관계자는 이러한 입장을 내놓았다.

"제8 구단 창단 문제는 현재 홀수인 7개 팀으로서는 정상적인 시즌을 펼칠 수 없어, 언론 쪽에서 먼저 제기한 것입니다. 전북지역이 전력 등 여러 면에서 가장 적합해 각 구단을 비롯해 프로야구계 대부분 동의에 의해 결정된 부분입니다."

하지만 당시 정치권 여당 내에서는 '한 건 했다'며 생색내고 다니는 자들이 있었다는 후문이다.

한편으로 당시 해태는 한국시리즈 3회 연속 제패 등 말 그대로 무적이었다. 해태 전력을 분산하려는 타 구단 이해관계도 맞아떨어진 것이다.

한일합섬은 이후 1993년 다시 반짝 주목을 받기도 했다. 현대그룹이 계열사 현대중공업을 중심으로 한 '제9 구단 창단'을 추진했다. 연고지 1순위는 울산, 2순위가 마산이었다. KBO는 이참에 '10개 구단 체제'를 목표로 세웠다. 이에 한일합섬 창단 추진에 또다시 군불을 지피려 했다. 하지만 한일합섬은 이전과 같은 의지를 나타내지 않았다. 한일합섬은 이를 끝으로 야구단 창단 분위기에 더는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현대는 기존 태평양돌핀스(전 삼미슈퍼스타즈·청보핀토스)를 인수, 1996년 인천·경기·강원을 연고로 한 현대유니콘스(현 키움히어로즈)를 창단했다.

 

참고 문헌 △<마산시 체육사>, 조호연 책임 집필, 마산시, 2004 △경남야구협회 소장 자료 △KBO 누리집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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